판소리에는 왜 북인가?
항상 명창에는 명고수가 있지요? 가만히 보면 판소리할 때 반주하면서 그 많은 악기 가운데 오로지 북 하나만 있는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서양의 오페라는 각종 악기를 다 동원해서 반주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는 비슷한 음악을 하는데 북 하나만 달랑입니다. 서양음악에만 길들여진 지금의 5,60대 사람들은 판소리를 처음 들으면 대개 지루해하고 뭔가 맛이 없게 들립니다.(지금의 5,60대 사람들은 학교에서 민요나 국악에 대해서 배운 바가 거의 없습니다. 음악은 서약음악이 주이고 국악은 천민들이 이어나가는 걸로 느꼈습니다. 제 친구 중에는 서양음악에 조예가 깊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악이라면 그건 음악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식은 식민교육의 연장인데 소년기 때 교육인지라 그 영향이 이렇게 깊습니다.)
그러나 소리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 놓을수록 신기하게도 소리꾼의 목소리와 북채의 짧고 딱딱한 느낌을 주는 고수의 북채소리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 이렇게 단순한 소리에 단순한 반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까요? 이제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판소리의 소리색깔은 한민족 서민들의 정서가 걸러지고 걸러진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심층의식 가운데 그 소리가 뜻하는 감성을 알게 모르게 느끼게 됩니다. 서민들의 정서란 오랜 전통사회에 속박된 서민 생활의 안타까움이나 힘들게 살던 슬픔을 아무런 형식에 매이지 않고 그대로 내보인 정서라는 것입니다. 즉 옛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평소에 일하면서 생활하면서 혹은 술마시고 취해서 그 기분에 따라 흥얼거리는 음조들이 굳어진 것이 지금의 판소리인 것이죠. 이러한 감성을 기 흐름으로 표시하면 왜 판소리에 어울리는 반주가 가야금이나 해금 혹은 장구가 아니라 북이 되야 하는지 쉽게 이해됩니다.
판소리에 들어있는 소위 한(恨)이란 것은 슬픔이 정제된 것이자 동시에 체념이 들어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체념이란 운명을 가는대로 내버려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의 기를 밖으로 능동적으로 발산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를 방치한다는 듯입니다. 따라서 그 기운은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흘러가는 가는 것이죠. 이는 기가 막힌 형국은 아니죠. 모든 표현은 기를 밖으로 내뿜는 생리에 뿌리를 둔 것이므로 어떤 소리이든지 기가 막히는 소리는 없습니다. 즉 자연스럽게 소리를 낸다는 것은 내 몸의 병을 치료하고 원기를 회복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판소리의 소리는 자신의 기의 흐름을 감정에 맡겨두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 내려 가는 데 그것을 소리로 표현하면 소리가 끝없이 늘어지는 소리가 됩니다. 만일 소리가 마냥 늘어지게 되면 소리꾼도 기진맥진(기가 마르고 맥고 끝나고)하게 되고 거기에 몰두하는 관객들도 기진맥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늘어지는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니 공연의 맥이 끊어지게 됩니다. 이 때 기가 마냥 흘어내려가는 것에 대한 제동으로 짧고 딱딱한 북채가 마디를 만들어 주면 늘어진 기운이 갑자기 주춤하면서 소리꾼이나 관객들이 새로운 기를 흡수하는 기회를 만들어 기지맥진이 되는 것을 피하고 순간적으로 활기를 되찾습니다. 인체의 기는 나가는 기만큼 들어와야 몸을 유지할 수 있는데 소리로 나가는 기가 북채소리로 마디를 만들어 주는 순간 바로 몸으로 기를 흡수합니다.
늘어지는 판소리가 음의 기운이라면 짧고 강한 북채소리는 양의 소리입니다. 즉 소리꾼과 고수는 음과 양을 조화시키는 것이 그 공연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의 기 흐름은 언제나 음양이 깨지기를 기다리는 동시에 다시 음양이 균형으로 돌아기는 것을 기다립니다. 바로 이것만 맞추어 준다면 아무리 소리와 반주가 단순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소리꾼이야 기의 소모가 많겠지만 관객은 기의 소모가 다른 음악에 비해서 기의 발산이 적으므로 장시간의 공연도 피로하지 않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판소리에 다른 악기로 음양을 조화시킬 수가 있을까요?
우선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어떨까요? 판소리의 정서는 기가 모여서 절로 흘러가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기를 넓게 발산시킵니다. 감성을 모으는 사람의 소리는 기가 수렴됩니다. 판소리는 기가 수렴되면서 동시에 그것이 저절로 흘러나가는 기운입니다. 따라서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오히려 기미가 맞지 않습니다.
해금은 어떨까요? 해금은 기운에 마디를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장구는 어떨까요? 아마 부분적으로 어울릴 것입니다. 그러나 북보다는 끊어주는 마디가 가늘어 가늘어지는 소리에 묵직하고 짧은 북채소리에 비하면 역시 음양의 조화는 모자랍니다.
종은 어떨까요? 쇳소리는 너무 날카롭고 종소리의 여운은 너무 깁니다. 날카로운 기운은 듣는 사람의 기를 방어적으로 유도하여 소리의 기운을 마음 놓고 들어오게 하는데 방해됩니다. 긴 여운은 역시 마디를 만들어 주지 못하구요.
징은 어떨까요? 기운의 발산이 너무 심하죠? 역시 음양의 조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피리나 대금이나 날나리등도 위에서 말한 이유로 판소리의 반주로는 맞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경험에 의해 저절로 맞추어진 기미(氣味)인 판소리에는 역시 북채가 어울립니다. 기미란 음양의 흐름인데 기란 양, 미란 음을 말하는 것이니 북은 기요 소리는 미이니 이렇게 음양이 맞추어지면 바로 기미의 조화된 맛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 서양악기와 국악기 혹은 서양음악과 국악의 접목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시도는 사람들의 정서를 알지 못하고 그냥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실험이 되면 단순히 악기나 음악기술의 혼합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김치에 샐러드를 섞으면 더 좋은 음식이 탄생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당연히 저절로 여러가지 혼합된 형태의 음악이 나올 것입니다. 마치 근세 조선의 김치가 서양에서 들어온 고추가루를 이용하여 더욱 풍부해졌듯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미를 인식하든 못하든 음양의 조화를 몸으로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