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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학의 생활생리 - 정신과 육체라는 단어에서 본 세계관

강남할아버지한의원 2014. 7. 9. 13:47

사람의 몸을 크게 보면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죠.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육체는 눈에 보이는데 비록 정신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체험적으로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정신이란 말과 육체란 말의 의미를 잠시 생각 해 보기로 합니다.

어원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바로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세계관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에는 단순히 개체의 생리 뿐 아니라 사회의 생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정신과 육체라는 단어의 기원

정신과 육체라는 단어의 기원이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나왔는지 필자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아도 알 수가 없네요. 그럼 하는 수가 없이 그 동안 필자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한 내용을 정리해서 알아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모든 정보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 문자화 되는 것이니까 개인의 생각이라고 무조건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독자분들 가운데 이와 관련하여 가르침이 있으시다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19세기 말에 나온 의서(醫書)인 방약합편에 보면 사람의 몸을 나누는 대목에 정신 혹은 육체란 말은 없습니다. 정신을 나타내는 말에는 그냥 신(神)입니다. 육체를 나타내는 말에는 그냥 신(身)이란 말이 나옵니다. 다만 육체의 기능을 설명할 때는 정(精) 혹은 기(氣) 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 말에는 정신을 나타내는 말에는 얼 혹은 넋이란 말이 있습니다. 한자어로는 영(靈) 혼(魂) 백(魄) 이란 말이 있구요.

그러니까 19세시 말까지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 혹은 육체란 말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막연히 추측해보면(아마도 맞을 것 같습니다만) 정신과 육체라는 단어는 아마도 일본 학자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어나 기타 유럽어를 번역할 때 신(神)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다양한 개념을 사람의 신(정신)과 구별해야 했고 또한 몸을 나타내는 말에 영어에도 flesh(살) body(몸체) 등이 있듯이 몸은 살과 뼈로 구성되어 있으니 살을 나타내는 육(肉)과 뼈의 형태를 나타내는 체(體)를 합쳐서 육체라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참고로 정서적으로는 싫어도 근세의 일본은 학문적인 수준은 상당했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이런 인정이 곧 매국의 논리로 비약되는 것은 결코 용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사람의 신(정신)과 종교적인 신과의 구별

동아시아 학자들이 서구의 단어가운데 god을 번역할 때 고민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god에 해당되는 단어를 동아시에서 찾기가 쉽지 않앗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만 조선은 하나님이란 단어가 있어 god와 비슷한 개념의 단어가 있지만 청(淸)이나 일본에서 생각하는 천(天) 과는 god는 역시 다른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컨데 동아시아의 천이란 개념은 자연 혹은 우주적 질서라는 개념이 들어 있는 것에 비해 god는 너무도 인간적인 절대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god의 개념을 하나 하나 뜯어보면 마치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신(神)의 개념과 매우 비슷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상벌을 내리고, 힘이 있고, 또한 사람들이 모시고... 이런 개념은 마치 전통사회에서 조상신을 모시는 것과 같으니 god를 신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면 신의 전통적인 개념과 기독교적인 신(= 기본적으로 서구문명에서 말하는 신)의 개념과 혼동할 수 있으므로 살아있는 사람의 신은 육체적 기능(= 精) 속에 있는 신이란 뜻에서 정신이라고 구분하지 않았을 까 합니다.

3. 동아시아의 여런 신들은 어떻게 인식되었을까요?

위의 추론에는 쉽게 생각나는 의문이 하나 남습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많은 신들, 예컨대 , 신선, 하나님, 천지신부처, 태상노군명, 선왕, 산신이나 수신, 귀신들을 살아있는 사람의 신과 달리 어떻게 구분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서구에서 들어온 신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신에 대한 인식의 바탕때문에 우리 선조들도 그럴 것이라고 간과하고 있는 선조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아시아의 종교적인 신들은 기독교의 절대자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고있는 이승에서 인연따라 죽으면(몸을 버리면) 신은 선계도 가고 불계도 가고 도계도 가고 그냥 저승에 있기도 하고 이승에서 떠돌기도 하고 합니다. 그래서 조상이 세상을 떠나면 천도제도 지내고 절에다 모시기도 하고 별도의 사당을 만들어 모시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현재의 우리 속에 내재된)아주 단순한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신은 기독교의 절대신과 달리 사람은 인연있는 사람끼로 신도 인연있는 신끼리 모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힘들면 그 사람과 인연이 있는 신은 인간사에 관여도 합니다만 사람들이 잘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구걸하는) 모습을 보면 평소에는 사람과 신은 서로 관여하지 않고, 모른 척하고 서로 다른 계(界)에서 동시에 같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약한 사람들이 당하면 늘 하는 말이 하늘도 무심하다고 합니다. 왜 하늘 쯤 되는 자리에 있으면서 보고도 모른척 하냐란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요즘 각자도생이란 말이 많이 들립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신은 그렇지 않죠. 인간사 모든 것을 지배하고 맘에 들면 상주고 맘에 안들면 벌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상은 웬지 기독교의 신이 말하는 이상향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든 게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열받은 서구의 철학자들은 신은 죽었다 고 외치게 됩니다.

이렇게 동서양이 신에 대해 서로 다른 감성이 나오는 이유는 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4. 현재의 우리의 인식세계

현재의 동아시아, 좁게는 우리나라의 사람들의 신에 대한 개념이 너무도 혼란스럽습니다. 전통적인 감성과 서구를 숭상하는 감성이 섞여져 그때는 그때, 이때는 이때에 따라, 혹은 개인의 감성에 따라 신에 대한 개념이 달라집니다. 그 혼란의 근원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정신은 마치 흰종이에 색칠하는 것과 같아 새로운 감성이 들어 왔다고 해서 전에 칠한 색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꾸 덧칠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 있는 신의 개념중 가장 깊은 곳에는 선, 그다음은 도, 그 다음은 불이 들어 있고 최근에는 기독교가 덮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급하면 아주 옛날 습관이 나오듯이 우리들이 어떤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면 가장 깊이 새겨진 어렸을 때의 감성 즉, 인식이 나옵니다. 바로 선(이것이 부분적으로 무속으로 변질된 부분도 있지만)이 나오게 됩니다.

선이란 인내천입니다. 일부 과학자들을 제외하고 세계의 여는 종교라도 자신들은 모두 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만 오로지 우리만은 자신이 곧 신이라고 합니다. 이 인식의 차이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의 현실을 바꿀 것으로 생각합니다.

5. 세계관이 현실에 미치는 구체적인 것들

요즘 세상은 과학의 발달로 하루가 다른게 변하고 있다고 해도 뭐라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과학적인 결과물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예컨대 스마트 폰이 일상을 바꾸어 놓는 것 처럼요. 물론 그렇다고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 즉 생노병사가 바뀌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변화는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

미래의 그 많은 변화를 일일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생명과 관련하여 의학적 기술이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상품의 가치로 변화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지금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선택의 기준이 바로 세계관입니다.

이승을 좀 더 좋은 다른 곳으로 가는 역으로 생각하는 경우(우리)와 이승이 곧 종점(서구)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살아가는 방식이나 의학적인 접근에서 많은 차이를 가져올 것만은 확실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이런 철학적인 인식의 차이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인간, 연명치료, 장기이식이나 죽을때까지의 투약 등에 대한 의학적 처치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