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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생명의 아우성입니다
강남할아버지한의원
2015. 5. 20. 14:37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너무도 당연히 몸이 비정상적인 생리활동( = 병리 )을 생각합니다. 지극히 맞는 말( =참 )입니다. 이 명제 (몸이 아프면 병리가 있다.)가 참이라면 부정과 역과 대우는 어떨까요?
가. 이 명제의 부정은 몸이 안아프면 병리가 없다는 것인데 이건 참이 아니죠. 나. 이 명제의 역은 병리가 있으면 몸이 아프다는 것이고 (이것도 참이 아니구요) 다. 대우는 몸에 병리가 없다면 몸도 아프지 않다. (이것은 참이죠)
어렵게 시작했네요. 쉽게 말해서 몸에 병리가 있으면 아플 수도 있고 안 아플 수도 있는데 만일 아프다면 반드시 병리는 있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사실 위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이야기 입니다. 한의사는 진단을 통해서 그 사람이 몸이 아프든 안아프든 병리를 구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사람이 신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모든 병리를 다 알 수도 없고 또한 안다고 해서 모든 병리를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일반인과 용의(미치지 못하는 의사)와 명의(평균수준) 그리고 신의( 평균수준을 상회하는)로 정도를 주관적으로 가릴 뿐입니다.
자, 지금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렇다면 아픔, 한자어지만 쉽게 사용하는 말인 통증은 병리이니 무조건 나쁜 것인가? 그리고 통증이 생겨나면 무조건 병리가 악화된 것인가에 대한 공부입니다.
1. 생리와 무생리는 삶과 죽음을 뜻합니다.
생명체가 살아가는 이치를 줄인 말로 생리라 합니다. 만일 생리가 없는 경우는 이미 생명체가 아닙니다. 죽은 것이죠. 그런데 생리와 무생리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어떤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라면) 그 사이에 시간이 있고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을 병리라고 합니다.
병리가 생기게 되면 외부적으로는 얼굴색과 기운이 내부적으로는 맥상과 들어오는 천기(공기 등)와 지기(음식), 나가는 탁기(몸의 여러 곳에서 생기는 분비물)가 달라지게 됩니다. 한의사는 이것을 감각기관으로 느끼고 그 이치를 궁구하여 내부적인 병리를 파악하는 것이고 양의사는 기계를 통하여 내부장기의 활동이나 구조 등으로 파악합니다. 물론 한의사나 양의사나 몸의 병리를 파악했다고(이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해서 치료를 올바르게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병리를 일반인들이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어려운 부분이 전문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는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간단히 병리를 파악하는 방법을 말하고자 합니다.
2. 병리를 알아내는 아주 간단한 방법
삶과 죽음의 사이의 상태가 병리이니 병리를 단순화시키면 삶과 죽음의 상태를 비교해보면 그 사이에 있는 상태면 병리임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란 누구나 다 인식하니 죽음의 상태만 이야기 하면 쉽게 아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의 상태는 1) 움직이지 않는다 -> 따라서 움직이기 싫어하면 병리(이하 우측은 모두 병리) 2) 숨을 쉬지 않는다 -> 숨쉬기가 힘들면 3) 누워있다 -> 눕고 싶으면 4) 맥이 없다 -> 맥상이 늦어지면 5) 감각이 없다 -> 감각이 둔해지면 6) 말을 하지 못한다 -> 말이 둔해지면 7) 눈을 감는다 -> 자꾸 눈을 감고 싶으면 8) 듣지 못하면 -> 청각이 떨어지면 9) 먹지 못한다 -> 먹는게 불편해지면 10) 얼굴색이 누렇고 회색으로 변한다 -> 피부에 핏기가 없어지면 11) 몸이 차다 -> 체온이 떨어지면 (심장에서부터 먼곳부터) 12) 대소변이 흐른다 -> 대소변 통제가 안되면 13) 냄새가 난다 -> 몸냄새가 심해지면 등등입니다.
위에 우측에 나타나는 증상이 나타나면 병리가 진행 중인 것입니다. 물론 종종 그 반대 현상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죽음에 대해서 저항하려는 삶의 의지(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때문입니다. 예컨대 열이 난다든가 혹은 통증이 생긴다든가 하는 증상들입니다.
위에서 열거한 병리증상들을 보면 대체로 늙어가면 당연히 생기는 증상들이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늙어간다는 것은 그 만큼 죽음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3. 통증은 죽음으로 가는 길에 저항하려는 위대한 자연의 배려입니다.
바로 위에서 죽음의 상태에 이르면 감각이 없어지니 통증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병리가 있다고 통증이 동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맨 처음의 명제에서 통증이 있으면 병리는 반드시 진행중인 것은 참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연이 생명체에게 준 위대한 배려 때문입니다. 그 배려란 오래 오래 살아가도록 한 배려인 것입니다. 즉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다시 삶을 이어가도록 하는 배려인 것이죠.
그렇다면 결국 통증은 병리에 대한 치료라는 뜻이 됩니다.
4. 사례를 통해서 통증이 치료라는 것을 공부해 봅시다.
통증이 진행되는 병리에 대한 치료라면 왜 우리는 고통을 받아야 할까요? 이 글이 너무 논리적으로 흘러 읽어가는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간단히 결론만 정리합니다.
1) 통증이 있으면 그 부위로 기와 혈이 몰리게 됩니다. 새로운 기혈이 가야 그 부위가 정상적인 생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통증을 없애는 진통제는 이러한 회복기전을 억제하니 고통은 덜하지만 그러나 회복은 더디게 합니다.
2) 통증이 있으면 몸은 통증을 싫어하니까 통증이 더 심해지지 않는 쪽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즉 병리가 더 진행되지 않도록 최대한의 몸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컨대 허리가 아프면 쉬게 되는데 쉬는 과정을 통하여 치료가 빨리 되는 것입니다.
3) 때로는 병리는 심각하게 진행되는데 통증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예후가 대단히 좋지 않는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병리가 막판에 이르도록 통증으로 자연치료되는 과정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여러 종양류나 경화증 혹은 습담이 쌓여서 생기는 퇴행성병증 등이 그런 것입니다.
만일 이런 경우 막판에 이르지 않는 상태에서 통증이 나타난다면 치료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높아집니다.
4) 위의 3)번에 관한 사례 둘을 들고자 합니다.
첫째는 한의원에 오시는 노파 한분이 걸을 때 뻗정다리로 걷습니다. 왜냐하면 무릎이 굽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다리를 땅에 걸리지 않게하기 위해 옆으로 원을 그리면 걷게 됩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탕약과 침치료를 하다보니 무릎이 아파온다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걷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원을 그리면 걷지는 않습니다. 그냥 앞뒤로 걷는데 조금 이상할 뿐입니다. 즉 처음에는 무릎이 굳어서 통증조차 없어졌다가 치료를 통해서 기혈이 흐르자 그 때야 비로소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록 무릎이 아프기는 했지만 그러나 운동내용은 보다 생리에 가까워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통증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병리가 진행 중인 것은 확실합니다만 그러나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상태보다는 죽음에서는 멀어지고 삶에서는 더 가까워진 것입니다.
둘째는 주로 젊은 사람들한테 흔한 사례인데 역류성식도염이 오래되면 통증이 없어지고 대신 위장부위가 단단해 집니다. 이런 경우에 심장과 간을 치료해주면 없던 통증이 생겨나고 그리고 치료가 지속되면 통증이 결국엔 사라집니다. 병리적으로는 만성화가 진행된 상태에서 회복하는 과정이 역순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즉 통증은 그 만큼 생명력을 회복하려는 아우성인 것이죠. 만일 이때 통증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 방치하면 나중에 반드시 종양으로 진화되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5. 통증은 어떻게 신호를 할까요?
이 부분에 관한 글은 얼마 전에 올린 글을 참조하면 좋을 것입니다.
( 몸을 만져보아 아프거나 예민한 곳은 병리가 진행중인 곳입니다 target=_blank>http://www.harabiclinic.com/list/view.php?id=freeboard&no=1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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