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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 우리들의 가슴에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

강남할아버지한의원 2016. 1. 4. 17:31

요즘은 어렵다고는 해도 필자의 젊은 시대처럼 밥 굶는 두려움은 없는 시대이고 또한 요리가 대화거리로 쉽게 오르는 소재가 될 만큼, 존재를 위협하는 원초적인 결핍은 대체로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당연히 문화라는 이름의 정신적인( 정신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상한 것은 아니고) 즐거움을 찾게 됩니다. 다 아시다시피 그런 즐거움 중에는 타락이라 생각되는 말초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도 있고 소위 교양이라는 조금 고상하고(= 생의 활력을 주는 ) 개인보다는 사회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경향가운데 보통 사람들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분야가 음악입니다. 요즘 사람들한테 음악하면 먼저 떠오르는 감성은 대중음악인데 요즘은 제도적인 교육수준이 넓어지면서 (높아진다고 말하기는 좀 거시기 하네요.) 소위 클래식 애호가들도 많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예컨데 공공단체에서 세비를 들여 운영하는 악단들도 많고 또한 뮤지컬이란 공연에 10만원 정도 혹은 그 이상 되는 관람료에 주저하지 않는 젊은 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추세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 나라에서는 대중음악은 어느 정도 자연적인 흐름에 의해 유행되고 있는 것에 비해 클래식은 제도적인 권력과 권위 그리고 지식인층에 의한 문화적 우월성을 인정하는 영향으로 유행의 폭이 좁고 얇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잘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혹자는 이런 추세를 내재적으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클래식만의 특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필자의 생각은 그런 현학적인 표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클래식이란 이름의 내재적인 아름다움은 누군가에 의해 지속되고 또한 일시적으로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다시 살아나곤 합니다. 필자는 이런 클래식의 본질적인 속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말이 아닙니다.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영속되고 재생되는 속성을 가진 문화를 클래식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우리한테 클래식 음악이란 건 어떤 음악을 가리킬까요?  

이에 답하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리랑은 아리랑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이 나라의 해외입양아들이 자라서 아리랑을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서 뭔가가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번 듣고는 바로 그 음조나 분위기를 따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이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어느 정도 경향을 갖고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의 클래식이 될 겁니다. 즉 우리의 클래식은 우리 민요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식자들이 감동을 많이 받는다는 고백을 들어보면, 예컨대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들었을 때 운명의 문을 두드린다는 말은 위의 아리랑 사례에 비추어 본다면 인위적인 주입에( 사실은 주입이 아니고 스스로 가싱을 위한 빌림이지만) 의한 가식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옛 노인들이 운명을 들으면 해괴한 음란음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노인들이 문을 두드리는 문화도 알리 없을 것이니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는 상상은 할 수 없고 그냥 강하고 여리고 크고 작은 음색이 교차하는 변화는 그 기분이 마치 운우지락의 형상을 그대로 본 떴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에 대한 감성을 더 쉽게 말해보면 그냥 우리 말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산이 많은 지역의 사람들과 들이 넓은 사람들의 말씨가 다른 이유가 바로 사람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과 삶을 이어주는 문화에 의해 배양되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친구 중에 어린 시절부터 소위 클래식 음악만 거의 60년 동안 좋아한 분이 있습니다. 물론 좋아할 뿐 만 아니라 실제 클라리넷을 포함한 다른 악기들의 연주도 거의 프로급입니다. 그 덕에 필자도 젊은 시절 클래식에 심취한 적이 있습니다. 심취할 당시에는 비록 지휘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친구는 음악을 들으면 그 지휘자를 정확하게 알아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제목을 몰라도, 이런 분위기 나는 것이니 누가 작곡했겠구나는 정도는  알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심취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군에 입대하면서 그러한 부르조아 흉내가 왠지 허상같고 기압이 든 군가가 더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수 년 전에 그 친구가 흘러가는 말로 해준 이야기에 깜작 놀랐습니다. 그 말은

"요즘 왠지 가요무대가 좋더라."

그 친구는 음악 자체가 밥벌이가 아니니 자신의 취향이 변하는 것을 아무런 선입관 없이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답해 주기를 "그려, 단군의 자손이니 비바람에 벗겨진 흙 속에 숨겨져있던 속살이 드러나는거네. 그게 진정한 자네 감성이지. "

우리가 음악이든 그림이든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음악이나 그림이 나타난 시대와 그 지역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껴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소위 문화해설가의 이야기에 예술작품에서 나오는 느낌을 억지로 연결시켜봤자 시간이 가면 잊혀지거나 혹은 남더라도 자신의 감성과 공통되는 부분만 일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즉 대부분의 감성은 허상이란 것입니다.

예컨대 남도의 상여소리는 남도에 살아서 그 감성을 공유한 사람들이 그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지 저 뉴욕에 사는 백인들이 그런 감성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아무리 운명교향곡이 명곡이네 어쩌내 해도 남도 사람이 그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지식인들이 툭하면 내뱉는 말 처럼 ) 결코 남도 사람이 무지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이란 공통적인 감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여기서는 집단적인) 감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에서 남도를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위대한 예술가들의 혼백의 깊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로 그런 작품을 이해하고 감성을 제대로 받아내기 위해서는 시공을 추월해서 위대한 예술가들의 혼백과 공유할 수 있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많이 알려진 음악가들 중엔 결국 그 작품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기본 음조가 그 사람이 살아온 나라의 민요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역시 민요는 -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수 많은 시간을 거쳐 교차되고 교차되어 하나의 공통된 감성으로 이어온 - 진정한 클래식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다 거치고 난 이후에야 위대한 작가들의 혼백(= 예술적인 가치)에 진정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흐름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예술적인 부문(쟝르)은 만든 사람이나 느끼는 사람의 기미가 맞아야 진정한 가치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소한 기미를 맞추는 연습없이 식자들이 세상을 논하고 철학이 어쩌고 삶이 어쩌고 그리고 우주를 논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입니다. 하물며 운명의 문 같은 건 처음부터 보통 수준인 우리한테 어울리지 않습니다. 짜자자 장 ~ 하는 음조는 그냥 떡방아 찧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솔직한 감성이고, 솔직한 감성에 젖을 수 있어야 그 다음 단계인 더 깊은 경지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