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를 기르는 행위는 그 자체가 최고의 섭생입니다.
1. 자연으로 가고픈 마음은 엄마를 그리는 마음과 같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풀나무를 가꾸고 싶어합니다. 흔히 막연한 표현으로 나이들면 농사나 짓지 하는 표현이 바로 그런 심리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글자 그대로 나이들어 시골가서 농사를 지으려는 의지도 있겠습니다만 현실적으로 노동력과 기술이 필요한 농사는 나이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심리적인 경향만은 조용하고 자연친화적인 곳에서 풀나무를 가꾸기를 원한다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젊은 사람이 처음부터 농사를 업으로 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마치 돈이 벌리지 않아도 음악이 좋아서 혹은 그림이 좋아서 등등의 개성이 강한 사람이 농사 - 즉 식물이나 동물을 기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로 농사를 업으로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향은 마치 나이들면 손자들이 유난히 이뻐 보이는 것과 흐름이 같습니다.
이런 경향을 일반화시키면 나이가 들면 생명체가 살아가려는 모습에서 다른 면에서보다 유난히 기쁨을 더 얻는다는 것입니다. 생명체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거기에서 오는 기쁨은 자신의 생명성을 활성화시켜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강하게 그리고 오래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저절로 어린 손자들하고 놀아주거나 혹은 강아지를 좋아하거나 혹은 풀나무를 마치 자신의 몸을 가꾸듯이 그렇게 소소해보이지만 그러나 생명의 본질을 몸으로 느끼려 합니다.
노인들의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그러한 생명성의 발휘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대부분의 노인들한테 차별없이 생명성을 느끼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화초를 기르는 것일 겁니다. 자신의 마당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공동의 마당에 풀나무를 가꿀 수가 있고 그 조차 없어도 남의 땅에 난 풀나무를 사랑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뭐라하지 않을 것입니다.
2. 풀나무를 기름은 단순히 교양화장품이 되어서는 안된다.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개인적인 생활에서 갖출 것을 다 갖추면 대체로 두 길로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 길은 육욕, 즉 먹는 것과 싸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고, 그리고 이런 류를 쫒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젊었을 때에 그런 욕망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던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합니다.
두번째 길은 흔히 소설에 나오듯이 난을 가꾸거나 혹은 정원을 가꾸는 것이죠. 이런 류를 쫒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욕망이 좀 더 커서 사회적이거나 우주적인 욕망이 있고 그리고 개인적인 삶이 지위고하나 부기빈천의 구별이 결국은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깨닫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 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 날에도 부귀자들 뿐만이 아니라 빈천자들도( 이런 구분이 위험한표현이기는 합니다만 그냥 문맥을 위한 표현으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에 말한 두 가지 경우를 다 좋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첫째를 좋아하면서 둘째도 좋은 경우는 그 마음이 생명에 대한 본질 보다는 아마도 그냥 교양을 장식하기 위한 깊이 없는 취향에 불과할 것입니다.
3. 공구리가 하늘을 가리는 현대도시
요즘 우리들은 상당 비율이 아파트에 삽니다. 생활편의가 좋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주택난에 대응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많은 비율이 도시에 살게 되니 하루 종일 보는 것이 공구리 건물과 길이고 그리고 여유 있으면 눈길은 손바닥 전자기기로 갑니다. 젊었을 때는 이런 환경이 부담되지 않습니다. 마치 돌 틈에 나오는 싹처럼 젊음이란 그런 생명력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자신이 모르는 답답함이 쌓이게 되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뭣인가가 부족해집니다. 그 뭣인가가 바로 넓은 세상과의 소통입니다.
소통은 꼭 사람끼리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끼리의 소통은 밥을 먹여줄 수는 있으나 그러나 우주적 존재의 기쁨을 느끼기에는 부족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기본적인 기쁨은 땅을 밟고 하늘을 보고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삼라만상을 보는 것입니다. 돈과 지위 혹은 기타 문화생활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 말하자면 필요에 따른 선택일 뿐입니다.
예컨대 요즘 말하는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서 평생을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살다 가는 사람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이 사람의 삶일까요? 결코 아닐 겁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부족함과 욕망이 자극이 되어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가는 것에서 존재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런 성취(작으나 크나)에서 스스로 느끼는 맛이야 말로 진실로 큰 기쁨이자 아름다움입니다. 그저 남들이 주는 돈이나 권위로 무작정 채우는 삶은 참으로 허망한 삶이 될 것입니다.
하물며 요즘처럼 공구리로 가득한 도시에서는 그런 풍요로움은 부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골로 가려고 하거나 혹은 도시라도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마당은 하늘과 땅을 그리고 풀나무를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추구하는 마음의 바탕은 바로 자연과 소통하고자 하는 존재의 본질이 밖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4. 화초를 기르면서 느껴지는 감성과 알게되는 것들
개인적인 경험을 잠시 이야기합니다. 젊은 시절에 사우디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사우디는 하늘과 땅이 다 넓습니다. 그리고 땅은 황토에 백회를 섞어 말렸을 때 생기는 누런 색이 전부이고 하늘도 가장자리는 모래먼지로 누렇고 가운데는 파란색이 햇볕에 바랜듯한 색깔입니다. 물론 덥고 건조한 것은 당연하구요. 이런 환경에 좀 오래 살다보면 가장 그리운 색깔은 화려한 색이 아니고 풀잎색입니다. 마음과 몸은 늘 뭔가 말라가는 느낌인데 그러다 어쩌다 사막 저 멀리서 한 포기 물만 보여도 눈과 마음이 확 풀리는 느낌입니다. 즉 초록은 마음을 풀어준다는 느낌입니다.
1) 풀 나무가 주는 생기(生氣)
풀 나무는 땅의 기운을 하늘로 바로 내보내는 기미입니다. 그래서 동물보다도 풀 나무를 보면 왠지 마음이 뚫리는 느낌이 먼저 와 닿습니다. 옛 조상들은 이런 기운의 흐름을 간기(肝氣)라 하고 색갈은 풀색인 초록으로 상징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간기란 간장의 양의 기운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기운이 흐르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옛 선인의 말에 따라 이론을 만들어 내고 그 이론에 따라 풀나무가 생기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필자의 경험에서 체험하고 그리고 아무런 선입관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감성이 풀잎에서 느끼는 것은 생명력이 밖으로 표현되는 감성이 생긴다고 객관적으로도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이란 음양사상에 대해 전혀 모르는 시골 노인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하시는 말씀들을 종합하면 필자의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테레비에 시골노인들이 자주 나옵니다. 비록 배운 바가 없어 그럴 듯한 단어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주위를 진심으로 사랑하신 마음에서 나오는 단어에 들어있는 그 내용은 이미 선사의 수준을 넘는 삶의 깊이를 느끼게해줍니다.)
필자는 그런 느낌을 선의학의 기의 승강출입으로 해설이라는 덧붙임을 했을 뿐입니다.
2) 생기는 사람과 교감을 하게 해준다.
풀 나무에서 살아있는 기운이 느껴진다면 그 순간부터 사람과 풀나무를 감성이 오고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구체성이 아니고 사람의 감성이 널리 퍼져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풀 나무 자체가 이미 사람한테 무언가 가르쳐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르침이라고 말하기가 거시기합니다만 분명히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도와주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합니다.
3) 풀나무나 애완동물이나 사람은 감성적으로 같다.
식물을 좋아하는 지인께서 해준이야기 입니다.
만일 잔에 냉수를 따라 붓고 그 냉수를 향해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그런 마음으로 노래도 해주고 ... 등등 하면 물이 육각수로 변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육각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물이라는 것은 확실한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무생물인 물도 그러할 진대 생물인 풀나무가 어찌 그런 감성을 모르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 분은 식물을 좋아하다보니 경험에 의해서 저절로 깨우친 인식의 확장입니다. 경전을 읽거나 외워서 아는 것보다는 직접 식물을 길러보고 사랑해보고 말해보고 그리고 같이 살아보다보니 그렇게 와 닿은 것입니다. ( 참고로 혹여 이런 감성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안되는 터무니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은 과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이비 과학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
동물은 사람의 감성을 느껴도 뇌가 보이지 않는 식물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은 열린 마음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 참고로 필자의 글 - 나무의 뇌는 어디있을가요? 라는 글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http://www.harabiclinic.com/list/view.php?id=freeboard&page=1&sn1=&divpage=1&sn=on&ss=on&sc=on&keyword=뇌는 어디&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96 )
필자의 짧은 경험으로도 식물도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그 사람이 정성을 쏟으면 그 식물이 살아가는데 바로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교감 과정이 귀찮다고 생각되는 사람들한테는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5. 풀나무 기르기는 최고의 노인섭생
시간이 흐를 수록 사그라드는 노인들한테 아기들이나 혹은 풀 나무들은 생기를 줍니다. 그런데 아기들은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개성을 표현하기 때문애 때로는 노인들의 기대치와 그 개성이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기들이 없는 노인들도 많구요.
그러나 풀나무들은 일단은 누구한테도 기대치가 없고 복잡한 인간관계가 개입되지 않으므로 누구라도 일방적으로 좋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풀나무를 기른다는 것은 노인들한테 최고의 섭생법이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요즘 매체에서 시끄러울 정도로 강조되는 노인들의 섭생가운데 운동 소식 젊은이들 따라하기 ... 등등의 섭생보다는 필자는 그냥 화초가꾸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1) 개별적인 즐거움
풀 나무 하나를 기르는 것에서 우리는 기운(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생기가 있으므로 우리 몸을 병증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치료해줍니다. 매일 물을 주고 자라는 모습에서 그리고 화초가 전해주는 기쁨이나 고통을 나누는 것 자체가 선이고 기도이고 명상이 됩니다. 이에 대한 입증은 말로서는 어렵고 직접 체험을 하게되면 알게 됩니다. 문자로 말하면 지행합일이 되는 것이죠.
2) 화초의 전체적인 조화는 마치 아이가 그림을 그리듯 - 창조예술
하나의 풀나무를 가꾸다 보면 저절로 다른 풀나무한테도 관심이 갑니다. 그러다 보면 풀 나무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각자의 풀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공간배치까지 생각이 이르게됩니다.
이렇게 화단이 생기게 되면 그 화단은 주위의 풍수와 어울리는 방향으로 가꾸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 과정은 자연이 사람한테 스스로 깨우치도록 안배한 창조예술이 됩니다.
창조가 진행되면 거기에는 늙음이 없어집니다. 창조의 순간에는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말은 길고 어렵게 풀어나갔지만 이미 경험한 분들은 바로 이해하실 것입니다.
노인이 죽는 순간까지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려면 정원가꾸기가 최선이라구요. 이것은 자연이 사람한테 베풀어준 위대한 선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