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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경맥과 우리 춤사위의 미학

강남할아버지한의원 2017. 10. 2. 15:26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면서 가장 자연스런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생리적 이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치를 이해하기 쉽게 말이나 기호로 풀어놓고 여러 사람들이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거나 혹은 그런 이치로 인하여 결과를 예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말이 길어진 이유는 우리는 과학이란 용어를 마치 고도의 인식의 세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왔기에 사실은 과학은 그런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들의 과학에 대한 그런 감성은 근세 역사에서 비롯한 외상후 증후군( Trauma ) 과 같다는 거죠. 사실 과학은 아주 편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때로는 분명히 경험으로 입증이 되는데에도 불구하고 그 이치를 설명하는 도구나 방법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관찰에서 얻어진 논리가 과학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식자들은 그런 것 일체를 모두 미신이라고 이름을 지어댑니다. 참 어이없는 일이죠. 즉 우리의 식자들은 아직 학문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형성이 안된 상태에서 과학의 결과로 얻어진 문물을 암기했기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현학적이면서 동시에 권력적인 갑질이 성행하는 것 같습니다.

자 서론은 이 정도로 하구요,
우리 선조들로 부터 이어온 춤사위를 보면 왠지 낯익은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쉽세 그 춤사위에 동조하게 되기도 합니다. 요즘 서양춤에 익숙한 세대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필자의 나이 정도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낯익은 모습이란 우리의 춤사위가 무술의 형태와 유사하기 때문이고 쉽게 동조하는 이유는 춤사위에서 보이는 기흐름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자가 춤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 우리 춤에 대한 많은 것을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종종 가보는 공연장에서 느껴지는 감성과 그 감성의 바탕에 깔려있는 기흐름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공연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춤은 살풀이 춤 태평무 교방춤 탈춤 무당춤 승무 칼춤 등입니다. 이외에도 더 있겠지만 그냥 먼저 떠오르는 내용입니다. 아마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춤은 얼핏보면 아주 단순하고 누구라도 흉내낼 수 있는 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보는 사람들은 춤을 보고 지루해합니다. 필자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몸짓 너머에 뭔가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 요즘은 우리 춤구경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나이 탓뿐만이 아니라 마구 흔들거나 혹은 많은 기교가 필요한 서양춤이 동작의 큰 변화로 인해 눈요기에는 좋지만 그러나 마치 할리우드의 폭력영화같이 마음에 오는 감성은 오히려 더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춤에서 느껴지는 감성 너머로 하나의 어떤 생리가 보여서 이 글을 씁니다. 즉 춤에서도 한의학 생리가 보인다는 면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에 대한 무한한 깊은 감성이 매순간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주제와 관련해서 전에 페북에 쓴 글이 있는데 여기서는 간략히 편집하고 거기에 해설을 조금 달아봅니다.

언젠가 테레비에서 임방울 국악 경연대회를 하고 있는 중에 살풀이 춤과 태평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마 그 두 공연자가 잘해서 그런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분들이 상을 탈 만큼 잘했다는 것 보다는 춤사위의 조그만 동작 하나조차도 감동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1. 살풀이 춤

살풀이 춤은 느리고 동작이 크지도 않습니다. 잘 모르지만 대신 어떤 슬픔을 나타내야 하고 동시에 관관객들을 슬픈 감정에 이입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물론 살풀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춤사위를 얼핏 보아도 몸짓 전체가 왠지 슬퍼보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단순한 동작이 반복되는 듯한 그 때에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춤꿈의 손가락이었습니다.

춤꾼의 동작 하나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든 순간이었지만 그 날은 유별나게 손가락이 눈에 들어 왔는데 그 이유는 춤꾼의 손가락 모두가 펴져 있지 않고 그렇다고 힘없이 축 늘어져 있지도 않고 오로지 첫째와 둘째 손가락만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뻗쳐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필자의 눈에 눈에 들어온 손짓은 바로 수태음폐경과 수양명 대장경이 보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수태음폐경이란 오장이니까 음경이고( 그래서 태음, 상세는 생략함 ), 오장은 기혈을 저장한 것이니 이 기혈을 밖으로 내보내는 데 폐란 생리가 상초에 ( 상초는 단순히 몸의 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하 상세는 생략) 작용하니 폐경은 폐기가 손으로 나가는 경락입니다. 그 경로는 폐에서 나와 대장을 거쳐 위로 들어가고 동시에 목과 팔로 나가서 팔 앞부분을 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손목부분에 와서 경로가 갈라지는데 하나의 경로는 첫째 손가락 끝, 다른 하나의 경로는 둘째 손가락 끝으로 갑니다. 그렇게 손가락 끝에서는 폐기가 일부는 외부로 나가 소모되고 외부의 양기는 들어와 나머지 일부와 함께 다시 순환이 될 것입니다.

손가락 경로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손끝에 흐른 기는 다시 팔의 뒷면을 따라 어깨로 다시 뒷목으로 간 이후에 턱으로 방향을 틀어 얼굴로 갑니다. 또 다른 경로는 뒷목에서 턱을 따라 가면서 다시 폐롤 들어가고 이어 대장으로 들어가는 경로입니다. 이 과정을 이번에는 수양명대장경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냐하면 손 끝을 통해서 들어오는 우주의 양기를  폐와 대장으로 나르는 일을 하는 경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감성 중에 슬픔을 주관하는 臟은 폐입니다. 폐는 양장인데 폐기가 막히면 밖으로 발산하는 기운이 막히게 되는 이 과정을 감성으로 보면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살풀이 춤에서 줄곧 폐경과 대장경 (대장은 몸의 내부로 발산하는 腑로 폐와 기능적으로 서로 보완함.) 의 손가락만은 펴는 이유가 보입니다. 만일 슬픔에 빠져 완전히 탈진이 된다면 모든 손가락이 굽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풀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그렇게는 살 수 없으므로 살기 위해서는 막힌 기를 풀어내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슬픔에 빠져 힘은 없지만 그러나 폐와 대장경은 제대로 순환시켜 슬픔에서 오는 기막힘을 풀어보자는 뜻이 바로 살풀이의 손가락에서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맨 처음 춤을 만들어낸 사람이 이런 경락이론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슬픔과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동감하다가 보니 저절로 그와 같은 춤사위가 생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필자는 다만 그 자연스러움에 녹아 있는 경락이론을 풀이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경락이론과 춤사위와 감성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런 일통(一通)은 우리의 선조들이 갖고 있던 가장 자연스러운 감성을 그대로 표현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2. 태평무

두번째 눈에 들어온 춤은 태평무였습니다.
태평무는 기쁨을 표하는 춤입니다. 따라서 기의 발산이 전신에서 가볍게 나가야 합니다. 당연히 양의 장이어야 하고 그래서 관련 장부는 심장이 주이고 폐가 보조가 됩니다. 역시 춤꾼의 손가락을 보니 살풀이 춤과는 달리 2지 3지를 4지까지 다 펴고 율동을 합니다. 3, 4, 5 지가 음경인 심포경과 심경 그리고 돌아오는 양경은 소장경과 삼초경으로 모두 심장과 관련된 경맥입니다.

감성으로는 심장은 즐거운 즉 喜입니다. 심장은 양장으로 그 기운이 뻗어나가는 세기가 가장 강한데 따라서 이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고 한 곳으로만 나가게되면 지나치게 되니 ( = 탈진 ) 전신으로 기운이 퍼져 약하게 그러나 넓게 나가는 기운입니다. 그러니 줄거움을 표현하는 춤에서는 손가락 전체를 펴는 것입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너무 기쁜데 표현을 하지 못하면 심장이나 뇌혈관에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역시 태평무와 그 감성과 그 경맥이 일통합니다.

만일 살풀이에 손 바닥을 모두 펴거나 태평무에 손가락 두개면 편다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그 춤에 대한 감성이 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에 대한 해설을 한다면 일통이 안된 상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요즘 국악하시는 분들이 대중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우리것 서양것 옛것 지금것 마구 혼용하는데 문제는 혼용 자체가 아니라 (이건 기술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이 혼용이 갖고 있는 감성을 충분히 조율하고 또 해서 서로 통하는 것이 있을 때 자연스럽고 또한 공감도 될 것입니다. 국악에 서양악기나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면 당장은 듣기에 신기하기도 하고 신선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이 왠지 낯설지요. 마치 이 나라의 가곡이나 민요를 이태리 발성법으로 소리하면 그 맛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고 요즘 가요무대에 젊은 처자들이 나와서 옛 노래를 하는데 노래 자체는 흠잡을 것 하나도 없이 잘하는데 노래가 갖고 있는 그 맛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도는 당연히 젊은 사람들이 해야할 부분입니다만 충분히 내공을 쌓아 혼재된 감성이 자연스럽게 농익어 저절로 흘러넘칠 때야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참고로 춤 이야기가 나왔으니 사소한 개인적인 감성을 덧 붙입니다.

3. 교방춤과 탈춤

의자로서 사람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아와야 하는데 그 동안 이런 부분에 무심했던 것이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물론 젊은 시절에 수련 중에 절로 생기는 춤이자 무술에서 막연히 우리 선조들의 몸짓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동안 여유가 없어서 춤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에는 그냥 유행따라 하기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그러다 수 년 전에 장사익선생님 공연 후 뒷풀이 장소에서 어느 중늙은 여자가 춤을 추는데 국춤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조금은 선정적이다 싶어 ( 춤자세에 요즘 테레비에 나오는 그런 사위는 전혀 없었습니다만 그 느낌이 왠지 그렇습니다. ) 이런 춤은 술집에서 흥겹게 놀 때에나 어울리겠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분이 교방춤의 대가라고 해서 아차 싶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질퍽하게 놀았을 때, 양반들이 그렇다고 노골적인 것은 적어도 겉으로는 외면했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술집에서 어떻게 춤을 추었을까 하는 평소의 궁금함이 바로 풀린 순간이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하면, 우리의 탈춤은 그 내용이 노골적입니다. 물론 그 배경이야 압박받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그나마 기쁨을 얻는 부분이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성교가 유일한 탈출구인지는 몰라도 아이들하고 같이 보기에는 좀 거시기 합니다.

그런데 나오는 여러 탈 가운데 대부분이 그 성격에 어울리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이상하게도 젊은 각시얼굴들은 왜 이렇게 단순할까 싶었는데, 나이가 든 어느날 편하게 마음을 비우고 보니 각시 춤과 각시 얼굴(탈)은 사자춤이나 할매춤이나 기타 다른 춤을 우습게 만드는 면이 보였습니다. 바로 각시탈은 백치미가 깃든 분위기에 은근한 선정적인 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분들 가운데 혹여 우리 춤을 볼 기회가 있으면 필자가 말한 부분에 유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춤의 고수는 손가락 하나 하나에 그 분들의 진솔한 삶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