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후증후군 ( 트라우마, Trauma = 솥뚜껑 증후군)에 관한 선의학 해설
좀 상세하게 쓰고자 했는데 시간여유가 없어서 핵심만 말하고자 합니다.
요즘 영어를 쓰는 것이 전보다 더 심해져서 종종 고등교육을 받은 필자로도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나 개념들이 많습니다. 쓰는 사람이야 알고 쓰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듣는 사람은 다양하니 비록 전문용어라 할지라도 좀 거시기합니다. 트라우마도 그런 전문용어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외상후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이런 번역은 외상이라는 말에서 조금 범위가 축소된 느낌이 드네요.
트라우마는 쉽게 말하면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즉 뭔가 충격적인 사건이 자신한테 일어났을 때 그 때의 충격이 이후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죠.
그 충격적인 사건이 꼭 외상에 국한 되지 않고 정신적인 면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면에서 트라우마를 번역할 때 꼭 한자어나 개념어 대신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솥뚜껑증후군" 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1. 외상적 충격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
물리적인 외상 뿐 아니라 정신적인 외상을 포함한 모든 외상은 생명의 활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다만 그 정도에 따라 영향의 범위도 한계가 생길 것입니다.
바로 그 한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경우는 얕지만 평생을 가고 (예컨대 추위에 심한 고통을 당했다면 이후부터는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 평생가는 경우)
어떤 경우는 깊지만 짧을 수가 있고 (예컨대 덩치큰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이후에 격투기를 배운 후에 없어지는 경우)
어떤 경우는 다음 생에도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깊은 가난 혹은 치정처럼 가족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 깊어 다음 생에도 이어가는 경우)
대부분의 경우 깊은 상처 - 곧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정도의 상처 - 일수록 오래가는 것이 보통이죠.
2. 왜 정신적인 충격이 남을까?
다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가슴은 심장, 육체적인 구조물이라기 보다는 마음 상태를 뜻합니다.
자라가 무서웠다면 비슷한 모양의 물체도 자라라고 쉽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식의 오류입니다. 인식의 오류라고 하니 그 사람의 뇌가 잘 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오류는 스스로가 만든 매우 훌륭한 방어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즉 이는 뇌의 뛰어난 장점이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한 운전자가 눈길에 실수로 미끄러져 큰 사고가 났다면 그 이후부터는 그 사람은 눈길에 대한 솥뚜껑증후군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눈길에 운전하는 것이 두렵거나 혹은 아예 기피하게 됩니다. 이런 경향은 매우 비합리적인 감성같지만 사고를 예방하여 생명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주 훌륭한 비합리적 감성이 됩니다. 반대로 이런 비합리적인 감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사고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솥뚜껑증후군은 크게보면 아주 합리적인 감성이 되는 것이죠.
3. 솥뚜껑증후군이 생기기 위한 심층구조
이렇게 마음에 깊은 감성을 남기기 위해서는 마음의 깊은 곳까지 그 충격이 전해지고 동시에 그 깊은 마음에서 그런 충격에 대한 방어기제가 발동해야 합니다.
사람의 정신적인 깊이를 선의학에서는 영혼백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영은 인류라는 종 전체에 공통적인 정신의 깊이
혼은 개성을 나타내주는 개인의 정신의 깊이
백은 본질이 육체에 심어놓은 습기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를 직접 위협하는 자극에 대한 것은 상당히 예민해도 육체가 위협되지 않는 정신적인 단계는 매우 얕습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 많은 마음의 변화는 자신의 기반이 되고 있는 지식과 감성에 의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감성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결국은 사람은 외부의 모든 자극을 마지막에는 감성화시킵니다. 그래야 다음에 오는 비슷한 과정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상의 소소한 자극은 거의가 백의 단계에 머무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는 개성을 변화시킬 만큼 크지 않습니다. 그만큼 쉽게 잊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만일 육체를 위협할 만한 큰 자극이나 혹은 직접적인 육체를 위협하지는 않더라도 길게 보아 생명을 위협하는 큰 자극은 백의 단계를 넘어 개성에 영향을 줄 정도로 깊어지게 됩니다. 즉 혼의 영역에서 마음이 생겨나고 처리하고 반응하는 기제가 새로이 생기거나 혹은 기존의 유사한 기제가 교정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솥뚜껑이 생기는 이치입니다.
4. 솥뚜껑을 없애는 방법은 있을까?
솥뚜껑보고 놀라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진다면 그리고 이런 비합리성을 없애고 싶다면 과연 가능할까요? 예 가능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의 깊이를 혼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혼에서 작용하는 마음의 기제( 일종의 소프트웨어)를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이성은 합리와 비합리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이건 너무도 비합리적이라고 판단을 하고 그런 감성을 무시하는 노력을 한다면 그런 솥뚜껑도 감성도 결국은 서서히 무너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나이든 분들은 "물보다 진한 건 피고 피보다 진한 건 사상이다." 라는 어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피란 생명체에서 타고나서부터 살아가면서 처리된 정보를 다음 세대의 육체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선대의 정신세계의 일부를 다음세대는 공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내용을 감성화하여 핏속에 저장하고 또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 종족이 유지되는 이치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살아가면서 라는 말은 이 생에서 획득된 정보를 처리하면서 이미 갖고 있었던 혹은 있던 마음의 기제를 교정할 수 있는 융통성을 뜻합니다.
이에 비해 골수란 말도 있듯이 골수는 마음의 기제가 피보다 더 고정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 = 아직은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 상태의 ) 외부로부터 어떤 인위적인 정보를 반복적으로 주입받으면 그 정보는 비록 스스로 체험한 것은 아니더라도 서서히 핏속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 전에 비록 아는 바는 없지만 타고날 때부터 핏속에 들어있는 정보처리 기제를 변화시킬 수가 있게 됩니다. 그 결과로 피보다 진한게 사상이라는 말도 나온 것입니다. 또 실제로 그런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어떤 경우든 핏속에 새겨진 마음의 기제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 변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깊은 마음에 들 수 있을 정도의 자극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자극은 마음이 깊은 사람은 단순히 합리적인 생각으로만으로도 가능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강한 체험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고
더 못한 사람은 머리로는 알면서도 감성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합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