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교육 영어학습 선행학습 천재교육 등등의 비슷한 말들은 왠지 단어부터 짜증스럽습니다. 하지만 남한테 말할 때는 차분해야하니 선의학의 생리로 그에 대한 장단을 풀어봅니다.
많은 례를 일일히 열거할 필요도 없이 세살박이 아이한테 초등학교 과목이나 특정한 기술을 가르친다고 합시다. 이렇게 할 경우 과연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나타날 수 있는지 추론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어린 아이들의 성장은 육체 감성 지성 (체 덕 지)이 어울어져야.
이것을 말하기 전에 잠시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결론만 말합니다.
첫째 우주에 한번 존재한 것은 존재 자체가 영원히 없어질 수 없습니다. 다만 기 흐름에 의해 형태만 바뀔 뿐입니다. 예컨대 동물이 죽어서 동물의 형태는 사라져도 그 동물이 지니고 있던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고 우주의 다른 부분에서는 여전히 또 다른 순환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주에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다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코끼리가 듣는 소리를 사람은 듣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명제에서 사람의 정신은 우주에 분명히 존재했으므로 비록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할 뿐 비록 육체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주의 시공안에 혹은 그 밖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신 중의 한 부분은 사람의 혼이 되어 새로운 육체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혼이 새로운 육체에 들어오게 되면 마치 새로운 하드웨어에 지나간 프로그램을 깔아야 하는 것과 같으므로 기본 프로그램을 깔았어도 그 전에 있었든 응용적인 내용은 다시 시작해야 하듯 그렇게 사람의 지난 생의 기억은 다 지워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컴 운용자는 전에 쉽게 응용해본 데이타는 새로운 컴에서도 익숙하게 처리하듯 전생에 특정한 분야에 익숙했던 정신 활동은 이생에서도 쉽게 숙달이 되는데 이것이 보통 수준보다 많으면 사람들은 천재라고 부릅니다. 즉 이렇게 보면 천재란 기술이나 재능이 특출하니 혹여 돈벌이에 도움이 될까하여 사람들은 좋아할지 모르겠으나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천재라는 것이 결코 별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생에서의 다양한 체험을 속박하는 기제로도 작용할 수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정신발달도 이와 같습니다. 즉 새로운 컴퓨터에 기본 프로그램을 깔았는데 이에 대해 응용적인 데이타를 처리하는 과정이 바로 어린이 성장과정인 것입니다.
성장이란 육체적인 성장 뿐 아니라 감성과 지성의 성장도 함께 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는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활동에 의해 경쟁력이 우열이 가려지다 보니 많은 엄마들이 자녀들한테 보다 일찍이 공부라는 사회적 수용에 맞는 정신활동을 강조하나 봅니다. 그런데 지성이란 육체와 감성이 따라주지 못하면 지성도 지속적으로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 삶에 중요한 것은 지성보다는 감성이다.
감성이란 이미 인간이란 영혼에 오랜 세월 동안 각인된 성정입니다. 그것은 지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생각들의 오랜 침전물로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리하고 또한 그만큼 그 기세가 강하여 자극에 바로 나오는 것으로 이미 비슷한 생각의 과정이 생략된 반응인 것입니다.(수 많은 생각들의 침전물인 만큼 새로운 상황이라도 같은 생각을 반복할 필요가 없이 그냥 나오는 것이다.) 마치 빛을 반사하는 물리법칙처럼 생각이 없어도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성은 사람이 전생이라는 아주 오랜 세월을 통하여 시행착오를 거친 생각의 침전물이므로 모든 새로운 생각의 방향을 결정짓는 배경도 되고 또한 새로운 생각을 통제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생각에 의하여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의 행위는 생각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지만 보다 크게 보면 거의가 오랫동안 쌓여진 감성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역시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감성에 의하여 선택을 강요됩니다. 만일 사회가 이성적인 생각에 의하여 어떤 행위를 결정한다면 수 많은 인문학자들이 고생할 필요도 없이 그냥 컴퓨터에 결정요소만 입력하면 미래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를 포함한 어떤 인문학자들도 한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은 감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인데 바로 그 감성을 수량적으로 측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감성이 없는 사람이란 쉽게 말해서 찰리 채플린 영화에 나오는 자동화 기계공과 같은 사람입니다. 사업가는 노동자들이 감성이 없는 기계처럼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비록 어떤 사람은 일찍부터 생각하는 기술을 익혔다고 하더라도 그 생각이 감성이 없는 기계적인 생각이라면 찰리 채플린의 기계공과 다름없습니다. 즉 육체적인 기계공이나 정신적인 기계공이나 같다는 뜻입니다.
소위 합리적인 생각을 지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합리적이란 개념이 문제입니다. 현대사회의 경제논리에 빠져서 단순히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 풍조인데 그런 지성은 감성이 없는 지성이 됩니다. 그런데 존재의 가치는 사람이 무지해도 감성이 있어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컴퓨터와 같이 빈틈없는 생각으로 기계처럼 살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종종 합리성은 삶의 목적과 배치될 때가 있을 뿐 만 아니라 때로는 합리성 자체가 비합리성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참고로 요즘에 중요시 되는 창의력은 결코 지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과학적인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창의력도 그 기본은 감성입니다. 감성이 먼저 문제의식과 목표를 제시하고 지성이나 논리는 수단으로 감성의 실무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똑 같은 이치로 조기교육을 하는 중요한 목적인 한 사회에 지배계층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 통용되는 감성을 먼저 익혀야 가능합니다. 그 사회의 감성을 익히지 못하고 교육을 통한 논리의 억지 훈련은 자녀를 그저 기계공으로 만들 뿐이고 결국은 지배계층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3. 아이의 감성은 평생의 생각하는 습관을 좌우합니다.
아이는 백지와 같습니다. 흰 도화지에 맨 처음 색깔을 칠하면 다음에 다른 색을 칠해도 여전히 맨 처음의 색의 영향을 받습니다. 같은 이치로 아이들이 백지 상태에서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외부의 자극은 평생에 영향을 줍니다. (물론 전생의 감성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또 다른 특징은 육체적 성장과정이 빠른 것입니다. 육체적인 성장 상태에 따라 똑 같은 자극이라도 받아들이는 감성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극에 대한 반응이 체질에 따라 다르고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므로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개인의 개성을 나타내고 한 사회의 특징적인 문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이란 가변요소가 시공적으로 복잡하여 삶은 물음의 대상이 될 수가 없고 모든 것들의 최종 답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삶이란 정확하게 말하면 성공도 실패도 없고 삶 자체가 가치있다는 뜻인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나간 것 같아 사회분위기에 편승하여 조금 수위를 조절하여 표현하고자 합니다. 예, 요즘 이 나라의 중간계층의 엄마들이 바라고 바라는 자녀의 성공요인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에 맞는 아기교육에 대한 결론을 말하겟습니다.
많은 엄마들이 그리고 많은 청소년들이 인기를 끌고 싶어 합니다. 인기란 대중적인 인기이건 지배계층의 소수로부터의 인기이건 결국 돈과 성공을 보장해줍니다. 그런데 대중의 인기는 이 사회의 감성을 잘 타야 하는 것이고 지배계층의 인기는 지배계층의 특수한 감성을 공유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개인이 조기교육으로 아무리 영어와 논술과 수학을 잘해도 이러한 감성을 개발하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노동자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혹자는 특별한 창의력이면 튈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창의력은 감성의 개발이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이는 과거에 신문을 장식했던 어린 천재들이 성인이 되어 어떻게 살아기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그래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조기교육하여 좋은 성적으로 좋은 학교를 가면 비록 뛰어나지는 못해도 그래도 괜찮은 직장에 취직하여 자기 밥벌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라구요. 그러나 하라비는 이런 추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조기교육은 아마도 엄마의 영향력이 큰 초등학교나 중학교까지는 좋다는 학교에 가는 것이 효과를 미칠 것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나 특히 혼자 연구를 많이 해야 하는 과정인 대학과정부터는 그런 교육이 오히려 창의력을 저해할 것입니다. 대학에서 그런대로 연구성과를 내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조기교육을 받은 사람들 보다는 스스로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이것을 입증해 줍니다.(이런 통계는 없겠지만 개인적인 경험치로 근건한 것임)
그래도 조기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체로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자리에 취직도 많이 한 것은 분명히 조기교육의 효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한가지를 간과 한 것입니다. 즉 조기교육을 할 정도의 경제력과 정보력을 가진 중간계층이라면 그 배경이 그 자녀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 것이지 조기교육의 효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런 배경을 가진 부모가 아동기에 감성과 체육활동을 통한 사회적인 체제교육에 더욱 힘섰다면 오히려 자신의 자녀들은 더 크게 성장 시켰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사회에 은퇴년령에 다달은 사람들의 가정문제는 조기교육과 관계가 깊습니다. 물론 그 당시는 지금과 같은 조기교육과정은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암기위주의 치우친 교육은 조직에서 탈락되는 순간부터 동시에 자아도 잃어버리는 현상을 가져온 것입니다. 경제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원천기술이 선진국에 비할 바가 못되므로 언제나 휘청거릴 수 박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창의력의 부재, 즉 감성교육의 무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그 춥고 배고픈 시대에 찬밥 더운 밥 가릴 여유는 없었지만... 이런 부분은 사실 당시의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제대로 방향을 잡아주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었네요)
윗 얘기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까지 들어 말하면 백지에 색칠하듯 아동기에 육체적이든 감성적이든 자극이 가야 반응도 하고 적절한 반응을 위해 생각도 반복하게 하거나 혹은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는데(이러면서 감성이 쌓이게 되는데) 어린 머리에 많은 것을 주입하려다 보면 이와 같은 자극도 덜받고 반응조차도 학습되어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이나 영적인 진화가 더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습관은 나이가 들어도 점점 굳어져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스스로 일어서기보다는 어떤 권위나 힘이나 기술 등에 의존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하려는 경향이 짙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지금 세대의 늙은 이들 가운데 이런 경향을 볼 수 있고 직업군으로는 공부잘했던 직업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감성부재의 교육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타고난 체질의 구조가 완성된 시기(발달의 기본적인 방향)를 여자는 7세 남자는 8세로 보았으므로 그 전에는 과도한 정신적 혹은 육체적 자극은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공자가 말했다는 남녀치세부동석이란 말도 여기에서 준거한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체로 이 시기에 초등학교의 정규교육이 시작하는 것도 경험적으로 이런 생리가 알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살에 뭘 떼고 다섯 살에 뭘 하고 했다는 사람들이 과연 삶을 삶답게 살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종종 그런 분들 가운데 천재적 업적을 남긴 분들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본적인 생리에 비추어 보면 아마 요절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본적인 생리란 뇌에 너무 많은 기혈을 과도하게 몰리게 하면 반드시 뇌 혹은 간에 문제가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런 것은 보이지 않겠지만 선의학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에 반하는 억지는 반드시 피할 수 없는 병리를 마주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