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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통한 대리만족은 부모와 자식간에 공유하는 감성때문

강남할아버지한의원 2015. 1. 8. 16:54

부모의 한이 자식한테 이어지는 이치는 자식을 위해서 여기 이 순간부터 부모 스스로가 강해져야.

흔하게 듣는 말입니다만 부모의 선덕은 자식들이 나중에 받는다고 합니다. 주로 사람은 착한데 당장은 그 착함이 보상받지 못하는 상황일 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경험으로 보면 대충은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주의해서 생각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착하다는 감성과 무지나 겁심으로 인해 드러나지 않은 악심과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을 할 수 있다면 부모의 선덕으로 인해 자식이 복을 받는 경우는 좀 더 많아질 거란 확신을 들게 합니다. 쉽게 말해 부모의 마음 씀씀이와 자식의 마음 씀씀이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그 상관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는 목적으로 글을 쓰는 것입니다.

1. 일반적인 경험적 예측

보통 사람들이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내용이니 대체로 맞는 말일 것입니다. 다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므로 예외는 있을 것입니다. 대체적인 추세와 예외적인 사건이 같이 있는 경우에는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즉 대체적인 추세에서는 일반적인 원칙을 찾아낼 수가 있고
예외적인 사건에서는 일반적인 원칙을 성립시키지 않는 조건들을 확인하게 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원칙을 찾기 위한 사례모음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그냥 누구든 자식있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예를 들면 - 물론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떤 사건이나 대상을 마주했을 때 밖으로 보여주는 생각이나 행위를 살펴보면 좀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보면 바로 필자 자신이 옛날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식들을 훈육하면서 종종 스스로를 반성하곤 했었습니다.

근데 정작 놀라운 것은 필자가 아이들 나이 때 보여주었던 그런 생각이나 행위만 아이들한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갖게 된 감성을 아이들이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사례는 들기 어려우나( 사례가 너무도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런 사례 자체가 객관적으로 입증해주는 증거로 부족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충분히 조작가능한 것이므로) 이런 예를 몇번 겪고 나서 나이들어도 맘 속으로만 생각하는 감성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즉 필자의 감성이 바로 아이한테 이입되는 그런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을 겪고나니 워즈워드인가요? 왜 중학교 때 교실 벽에 붙여놓은 영어구절중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라는 내용이 생각나고 또한 그 말 뜻이 새롭게 와닿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워즈워드(?)를 단순한 시인이 아니라 구도자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아이는 어른의 감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한 거기에 새로운 정보나 감성을 쌓게 되니 어른보다도 더 진화된 영혼이란 뜻으로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2. 감성과 생각과 행위에 관한 유전인자(DNA)의 작용

유전인자란 선대의 육체적인 특징을 후대가 그대로 베끼는 과정에서의 분자서열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는 유전인자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네개의 유전인자가 배합됩니다. 그 중 조부모의 유전인자는 이미 부모의 몸 속에 들어 있으면서 자라게 되어 이미 부모의 형질을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니(요즘은 후천적인 형질도 유전된다는 학설도 퍼져있다.) 실제로는 아이는 부모의 형질과 가장 가깝게 형성됩니다.

자, 유전인자는 이런 물질적인 정보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정신적인 면도 그 안에 다 들어 잇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심지어 사람의 운명도 DNA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진위를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의 감성도 부모의 감성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주장이 믿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선의학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에 대해 기본적으로 공감합니다만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과 좀 더 과학이 발달하면 비록 DNA가 발현하고 안하고의 문제와 혹은 그 염기서열 자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정해진 감성 혹은 정해진 운명이란 가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선의학의 영혼백이론으로 유전을 해석합니다.

지금까지 일반적인 경험결과로 부터 얻어낸 추론과 그것을 과학적인 전개를 통해서 입증하려는 유전이론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선의학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런 사실적인 추세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선의학에서 존재의 본질은 물질이 아니고 정신이고 그 정신이 물질을 만들어내고 변화시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깊이에 따라 물질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 있고 반대로 물질의 영향을 받는 부분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물질과 정신은 서로에 영향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주도권은 정신에 있습니다.  

그 정신가운데 가장 깊고 온 우주를 주관하는 것을 본질(가치중립적인 단어로 선택한 것이고 사람에 따라 자연, 도, 불, 하나님, 하느님, 조로아스터, 공 등과 같은 뜻임)이고 그 본질보다 보다 구체성을 갖추는 단계의 정신단계가 영(靈) 입니다. 그 구체성이란 우주 전체에서 볼 때 동질적인 분류가 가능한 것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정신단게의 고유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영, 호랑이의 영, 나무의 영... 이런 식으로요. 그 다음으로 보다 구체성을 띄는데 개별적인 구별이 가능한 것을 혼(魂)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홍길동이 있다면 홍길동은 사람이니 사람의 영을 갖고 있는 동시에 홍길동이라는 개성을 갖춘 정신단계는 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얕은 단게의 정신단계는 백(魄)으로 이건 개성이 뚜렷하지 않고 다만 물질적인 욕구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없어지기도 하는 얕은 단계의 정신수준을 말합니다. 물론 이런 백의 활동이 깊어져 하나의 개성을 갖추게 된다면 그 때는 백이라고 하기보다는 혼이라고 해야겠지요.

본질과 영혼백은 정신단계의 전체를 이해를 하기 위한 나눔이고 실제로는 그 사이 사이에도 정신단계는 늘 있는 것입니다. 예컨데 민족혼이라면 개인의 혼과 사람의 영 사이에 걸쳐있는 단계가 될 것입니다. 즉 개인간에 공유하는 정신단계가 있지만 그것이 사람의 보편적인 공유는 아니고 제한된 경험을 갖고 있거나 기억된 사람들끼리만 갖고 있는 정신단계인 것입니다. 그 보다 더 작은 범위의 공유되는 정신단게가 있다면 씨족이고 씨족보다 더 작은 범위의 공유되는 정신단계는 결국 부모와 자식입니다. 그래서 그 정신단계를 공유하기 위해서 또한 이어가기 위해서는 정신의 상태를 물질 속에 기억시킨 우주의 배려가 바로 유전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전인자는 정신의 공유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정신으로 그 기억된 내용을지울 수가 있다면 유전자도 변이가 가능한 것이고 또한 실제로 유전자는 지속적으로 변이가 되고 때로는 그 변이가 심할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과 정신에서 최종적으로 물질은 정신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통 사람들이 강력한 정신을 원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그냥 부모의 개성을 이어가는 것에 그칠 뿐입니다.  

이 단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위의 1, 2번과 다른 점을 다시 명기해봅니다.
첫째, 유전이란 단순히 물질적인(육체적인) 특징만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감성을 이어가는 것이다.
둘째, 그 감성이라는 정신적인 활동도 단계에(깊이에) 따라 공유되어 후대로 이어가는 것이 있고 당대에 혹은 일시적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감성인 경우에는 육체에 그 기억을 심어 놓는다. 현대의학에서는 이것을 유전인자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 유전인자를 지배하는 정신의 깊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셋째, 이러한 현대적인 해석과정은 우리들이 선조로부터 들어온 말 중에도 이미 들어 있다. 예컨대 뼛속 깊이 새기겠다는 말이 바로 그렇다. 즉 유전인자를 조합하여 전달하는 줄기세포는 뼈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한편 같은 의미로 혼신(魂神)을 다한다는 말이 있는데 개인의 정신단계 중 개성이 있는 혼 속에 간직한다는 말이다.
넷째, 결국 부모와 자식은 영혼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영이야 사람이니 같이 공유함은 너무도 당연하겠고 혼 역시 개성의 확장이라는 정신단계의 영속적인 활동으로 그 감성을 후대에 까지 공유한다는 것이다. 즉, 부모와 자식은 눈에 보이는 육체 뿐 아니라 혼의 단계의 정신 즉, 감성을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격도 비슷하게 내려오는 것이다.

간단한 결론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그 단계를 이해하면 다른 정신현상이나 육체적인 현상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4. 한(恨)이란 결국 영혼의 확장이자 발전의 바탕

사람의 감성 가운데 무엇인가 이루고 싶었는데 다 하지 못하여 육체적인 죽음에 이르러도 그 욕망은 남아 있는 경우를 우리는 한(恨)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한이 남는다라고 말합니다. 말을 바꾸면, 그 욕망이 남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욕망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우주의 시공간에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우리는 영혼백의 이어감(유전)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한은 그 사람의 후손에 남아 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자식은 서로 감성을 공유하니까요.

다만, 부모와 자식간에 시공이 다르고 환경이 달라 그러한 한은 바로 자식한테 발현되지는 않아 보여도 그 마음의 흐름 어디엔가는 부모가 남긴 그 한의 욕망은 반드시 남아 있게 됩니다. 이런 한이 여러 사람이 공통된 한을 가지게 되면 이를 문화적인 흐름이라고 말합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예컨대 이 나라 현대사회를 특징지우는 아파트 문화가 바로 그런게 아닐까 합니다. 왜정시대의 수탈과 전쟁 등으로 선대가 집없이 살아온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제대로 된 집(= 중간계층이 사는 아파트)에 대한 한이 사회와 후대에 전이되어 그냥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다 시피한 것입니다. 아무리 대학을 많이 나와도 이 사회에서는 논리적으로 해석이 안되고 그냥 아파트는 갖고 있어야 사람이 사는 것으로 안심이 되는 정서 같은 것이 바로 한이 대를 이어가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런 한은 사회의 건전성에 부정적입니다만 그러나 만일 한이 사회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집안의 번성에는 긍정적인 욕망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늘 천시만 받아온 선대가 후손만은 반드시 고시에 합격해 떵떵거리는 것을 한을 남겻다면 그 후손은 그런 욕망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을 것이므로 비록 상황이 고시를 허락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하든 출세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면을 작용할 수도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이 사회를 위해 뭔가 과학적인 진보를 이루는 것을 한으로 남긴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후손( 혹은 그 집단에 쉽게 전이된 다른 사람일지라도, 왜냐하면 이런 한은 사회적이 욕망이므로 집안 사람에 국한 되지 않기에) 은 그 감성을 살려 과학적인 진보를 이루어 낼 것입니다.

말이 길어지네요. 필자의 생각체계를 독자들이 단순하게 받아들이 것을 원하지 않기에 말이 늘 길어지나 봅니다. 자 이제 정작 하고픈 말이 남아 있네요.

5. 자식을 제대로 키우려면 부모가 똑바로 해야.

지금까지 부모와 자식은 감성을 공유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부모의 감성이 자식한테 상당부분이 이어가는 것만 말했는데 공유하기 때문에 반대로 자식의 감성이 부모한테 들어가기도 합니다. 전자는 이미 위에 든 예로 충분하고 후자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일 엄마는 서울에 있고 아들은 미국에 있는데 아들이 어떤 사유로 매우 힘들어 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리고 그 힘든 감성이 자신의 혼의 깊이에 까지 닿는다면 엄마는 동시에 그 감성을 느끼게 됩니다.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몰라도 힘든 상황이 몸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불안감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만 왜 그런지 엄마는 모를 뿐입니다. 그런 경우 종종 꿈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만일 아들의 감성이 아주 절박하다면 엄마는 같은 시간에 왠지 절박감을 느끼게 됩니다. (주위에서 드물지 않게 보는 사례이지요?)

바로 이런 것이 자식이 부모한테 감성을 이입시키는 경우인데 실제로 감성이입은 많이 나타납니다. 다만 그 깊이와 상황에 따라 발현되는 정도나 형태가 다양하여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와 자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눈에 보이는 교류가 없어도 시공을 초월하여 감성을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한테 대리만족을 원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우주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식이 이런 부모의 감성을 이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받아들이는(저절로) 것은 다만 감성이고 부모의 대리만족의 구체적인 형태를 구태여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눈에 보이는 형태의 현실화는 영혼의 진화하고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 마지막 하고픈 말입니다.

자식이 잘 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우선 자신부터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에게 그 감성이 공유되니까요. 부모가 악착같으면 그 자식도 그 감성을 공유하게 되니 악착같은 감성을 갖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선악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특히 아직 어린 자식한테 강한 투혼을 길러줄 부모라면 일단 자신들이 현실에서 아주 강한 마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신은 약한데 아이들한테는 투혼을 원한다면 자식한테 그런 투혼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한 감성은 이미 아이들한테 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늘 매체를 통해 들어오는 가장의 자살 사건을 보면 동정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어리석음입니다. 아무리 자식한테 강해지라고 유서에 남겼어도 이미 자신의 약한 마음을 자식한테 전이시켜 놓고 강해지라고 한들 자식은 강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런 약한 감성은 혼이 윤회되면서 다음 생에 또 다시 비슷한 상황에 노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감성조차 대물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자는 영원히 약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고리를 끊자고 한다면 지금 당장 스스로가 강해져야 합니다.

지금 힘들어 하시는 많은 분들한테,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악착같아지라고 말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