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자살이란 단어나 개념은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성은 공적인 기관의 공허한 알림정도에 그치는 것같아 늘 안타깝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비극이 자신과는 머나 먼 사건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세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되면 그런 비극은 머나 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당연한 이치로 여러 사회적인 사건 역시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나무의 한 쪽 가지가 말라가고 있다면 옆이나 반대편 가지는 자신이 아니기에 안심하게 되지만 그러나 가지가 말라가는 증상에 대한 조치가 곧 바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은 옆가지나 반대편 가지도 말라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즉 남의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란 뜻입니다. 건강하고 발전하는 사회일수록 이런 동일체 의식은 강하고 병들고 후진하는 사회일수록 나만 피하면 된다는 분리의식이 진해집니다. 개인의 영적인 진화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물론 표현하느냐 혹은 안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시간과 공간의 어디까지를 감성으로 느끼느냐에 따라 개인의 영적인 능력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컨대 깨어난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범위가 너무도 넓게 생명체나 기타 존재물의 감성을 느낀다는 것이고 반대의 (소위 짐승에 가까운 사람들) 사람들은 인식하는 범위는 바로 지금, 그리고 자신의 편암함에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더운 날, 아래 뉴스를 보고 자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합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60808145039519
참고로 자살에 대한 필자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선택사항으로 봅니다. 물론 여러 제한적인 조건이 따랐을 경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 자살에 대한 한의학도의 단상 - http://www.harabiclinic.com/list/view.php?id=freeboard&page=1&sn1=&divpage=1&sn=on&ss=on&sc=on&keyword=자살&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78
노인의 이별 - http://www.harabiclinic.com/list/view.php?id=freeboard&page=1&sn1=&divpage=1&sn=on&ss=on&sc=on&keyword=자살&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128 )
중요한 내용은 뉴스에서도 지적했듯이 10대의 자살입니다.
이 나라에 왜 십대의 자살이 많을까요?
1. 먼저 자살은 언제 생각나고 언제 결행할까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번 쯤은 자살을 생각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
바로 일이 안풀릴 때죠.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살아온 환경(특히 인적인 관계로 만들어진)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고 판단될 때이구요. (물론 세상에 태어나 모든 바램을 이루고 더 이상 바랄게 없어 지루해서 하는 자살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런 경우는 이야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10대가 자살한다면 아직은 그런 판단을 할 능력이 없는 상태이니 이런 류의 자살은 주위(=사회)에서 막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10대의 감성을 생각해 봅시다.
2. 10대의 감성
10대는 우선 눈으로 보는 세상이 아마도 세상의 전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사고체계가 발달되기에는 좀 모자라고 또한 감성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포용하는 능력도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계급간의 정보가 노출되어 있고 또한 너무도 많은 정보가 일시에 와서 이를 제대로 소화시키기에도 벅찰것입니다.
필자의 경험이나 주위에서 겪었던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10대가 느끼는 감성을 말해봅니다.
1) 어렸을 때는 주위의 또래는 누구나 같은 상황으로 인식하여 불만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동네 또래들과 비교가 된다. 물론 개인의 능력보다는 거의가 부모의 능력이 비교가 되고 조금 씩 세상에 대해 위축되어 간다.
2)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이러한 차이는 더욱 크게 벌어진다. 특히 선생이 대하는 태도에서 더욱 크게 느껴진다.( 60년대의 학교선생은 현실적으로 준경찰 혹은 세무서리와 다름없었음. 기성회비 안내면 우선 매질부터 하던 시기였고 그런 매질이 이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졌었음. 물론 종종 좋은 분들도 있었지만 매우 드물었음. 보지는 못했지만 어는 영화에 '느 아버지 뭐하노?' 라는 대사가 전혀 특별하지 않았던 시대였음. )
책에서 배운 무슨 무슨 분위기하고는 전혀 다른 현실을 체감하기 시작하고 또한 세상은 비정하다는 것을 알게됨.
요즘은 당연히 덜하겠지만 그러나 상대적인 괴리감은 여전할 것임.
3) 중고등학교에 가게되면 점점 더 해짐. 이 때부터는 같은 동급생이 같은 동급생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됨. 왜냐하면 서로 환경이 다른 동급생들은 멀리하게 되기 때문임.
4) 이런 환경에서 차라리 폭력그룹에 합류하면 그런대로 존재감이 있을 것이나 천성이 그렇지 못한 애들은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게 됨.( 그런데 이런 환경은 필자의 소시적에는 너무도 많아서 지금의 60대들이 그런 환경을 이겨내고 먹고 살만한 세상을 만나게 되자 환경의 변화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젊은 애들을 질책하는 소위 꼴통화가 되는 면이 있음)
5) 그런데 요즘은 대중매체의 발달로 너무도 튀는 것을 추구하는 사회적 흐름이 있음. 돈없고 빽없고 주위 분위기가 불편한 10대 한테는 가혹한 고문이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임. 예컨대 맨날 식감이 아삭하다는 등 호화스럽게 먹는 얘기, 뒷태가 어떻다는 등 미모 얘기, 전망이 어떻다는 등 집자랑, 유행을 맞추지 못하면 무능해진다는 류의 소비성향, 뭐 각종 여행사진들이나 소위 스타들의 영혼없는 상류층 흉내내기 등등이 바로 고문이 된다. 즉 배고픈 사람 앞에 혼자서 맛있게 통닭먹는 행위와 같은 것이죠. 요즘 사회가 땀흘리고 연구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분위기보다는 하나같이 그저 사치스러운 소비위주의 분위기로 몰고가는 매체로 인해 고독감은 더욱 깊어짐. 심지어 수양을 한다는 사람들에게서 조차도 어떤 위안도 얻을 수 없는 - 그저 나는 이렇게 잘 나가고 있다는 정서뿐임.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환경이 따르지 못하고 개인적인 자질도 따르지 못한 10대가 어떤 희망을 갖게 될까요? 세상에 보이는 부분에만 눈을 뜬 10대한테는 태어난 것이 억울하고 또한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 것입니다. 서서히 끊어지는 동류와의 관계도 흔적이 없어지면 단 하나의 선택이 남게 됩니다. 세상과의 이별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이별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좀 성격이 발산적인 사람들은 죽음을 선택하기 보다는 폭력조직이나 군대나 이민이나 산속이니 혹은 종교단체로 피난갑니다만 그런 피난도 어느 정도의 인맥이 유지되어야 가능합니다. 그 조차 안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편안하게 이글을 읽을 수 있는 분들의 주위에는 아마도 이렇게 절박한 10대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런 경우에는 인연이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3. 10대의 감성은 누가 만들어 줄까요?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너도 나도 다 힘든 세상은 고립감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즘 처럼 누구나 다 잘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고 또한 그런 모습을 사회가 추구하고 나아가 당연히 이미 이 사회는 모두가 행복하다고 인정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된 상태에서 어느 한 개인의 삶은 이와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 될 때 감성의 혼란은 생깁니다. 나이든 사람도 그럴 진대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고 보이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인 10대한테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앞으로 뭔가 나아갈 길이 보인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인위적으로 미래가 있다고 매체에서 말해주어도 이미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미래가 없다고 인식시켜 주었기 때문에 환경이 불우하거나 혹은 특정한 경쟁상태에 매여있는 10대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살아있거나 죽거나 누가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또 현실이 그렇구요.
자, 문제는 누가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느냐 입니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이런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느냐 입니다.
혹자는 말하기 쉽게 정치권이 무능해서 사회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왠지 부족해보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교사에 관한 추억이 이 변명의 부족함을 보충해줄 것입니다. 즉 돈없어 기성회비를 못내는 애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교사( 60년대는 당연했고 70년도 고교때도 그런 기억이 납니다)는 아마도 남들한테 자신을 말할 때 인격자이고 상식적인 사람이고 그리고 어느 집단에 있더라도 의견이 아마도 가장 나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지금 소위 SNS에서 번듯하게 상식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과 다름없어 보일것입니다. 또한 가장으로서 부모로서 혹은 기타 집안 어른으로서 모자람이 없기도 했을 것입니다. 즉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 선과 악이 갈라지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사실은 그 가운데에서도 엘리뜨)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즉 쉽게 말해 10대를 자살로 몰고가는 분위기는 우리 모두가 만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포괄적인 용어로 표현합니다.
돈을 쫒는 사회, 그리고 인간의 감성 조차도 돈으로 표현하려는 사회, 그리고 돈을 쫒는 행태를 비난하려는 사람들조차도 결국은 돈이란 수치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사회가 오늘날의 10대를 자살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주체자는 특정한 집단으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 모두가 그렇구요.
4. 10대 자살의 예방
예방이란 병인을 없애주면 됩니다. 증상을 없애주는 것은 너무도 일시적입니다.
10대 청소년들의 자살 예방은 사회적인 캠페인으로 줄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그냥 증상을 잠시 가라앉히는 대증치료에 불과합니다. 예방은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누가 주체가 되어야 할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지식엘리뜨와 이런 여론을 실행하는 정치권 그리고 사회 문화권의 주체자들이 해야 합니다. 생명에 대한 철학을 뚜렷하게 인식된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돈을 무시하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종종 돈을 무시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남의 돈 - 결국은 남의 기운 -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경우는 글자에 매여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이란 그냥 에너지 입니다. 우주에서 에너지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더 큰 에너지인 생명의 존재를 보라는 말입니다.
5. 만일 예방에 실패하여 방치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앞에 글에서 ( http://www.harabiclinic.com/list/view.php?id=freeboard&page=1&sn1=&divpage=1&sn=on&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162 ) 종종 슬픔은 자살로 몰고가지만 그러나 여기에 분노가 가세하면 슬픔은 화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방법이 슬픔이나 화로 말하니 이 둘은 전혀 다른 감성같지만 그러나 인용된 글에서 설명했듯이 이 둘은 기 흐름이 방향만 조금 달라진 변화일 뿐입니다. 따라서 슬픔이 화로 변하는 건 너무도 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자살자가 한 명이면 사실 근처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몇 배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슬픔이 화로 변하게 되면 그 화는 금방 수십배로 확산될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에 대해서 따따부따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결국 자살을 방치하게 되면 사회적인 화는 급격하게 퍼질 것입니다. 그 화는 고스란히 사회구성원 전체가 받게됩니다. 특히 중간계층에 있던 사람들이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니다.
필자의 친구는 선원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기름배를 몰고다니는 선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이 친구가 수개월동안 교육을 받는데 그 내용은 안전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력이 아까울텐데 회사에서 그런 교육을 시키는 분위기가 좀 이색적이라고 했더니 답해주기를 우리 나라는 여전히 안전교육에 인색하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번 회사는 안전에 대한 고려를 많이 해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배 하나 잃게되면 그 손해가 너무 커서 작은 안전비용을 경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호등 없어도 교통사고는 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믿음 때문에 가끔가다 정말 큰 것을 잃곤 한답니다.
지금 10대 청소년의 자살에 대한 방치는 마치 신호등 설치 비용이 아까워 교통사고를 방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6. 선의학에서 보는 자살에 대한 기전
10대의 자살예방이 왜 절실한지에 대한 선의학적인 접근입니다. 간략히 씁니다.
1) 한 사회의 구성원은 정신적인 상태를 서로 공유합니다. 마치 한 나무의 나뭇잎이 뿌리를 공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2) 10대의 자살은 마치 연록색의 새잎이 스스로 말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다른 나뭇잎들도 말라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일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3) 한 청소년이 자살을 하게 되면 그와 정신을 공유한 모든 사회구성원이 똑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본인은 인식하지는 못할 것입니다만 저 깊은 심층에서는 이미 그렇게 정신의 기운이 흐르고 있습니다.
4) 따라서 청소년의 자살이 늘어나는 것은 마치 빙하벌판에 깊은 크랙이 많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크랙이 많아지면 아무리 겉이 멀쩡해 보여도 어느 순간에 빙하 벌판은 크게 부서지게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자살률 1등이라는 지위를 오랜 기간 지켜오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딛고 있는 땅에 구멍이 송송 뚫린 곳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멀쩡해 보여도 언제라도 땅이 꺼질 수 있는 환경은 조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순간 우리 모두가 각성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크나 큰 몸살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