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개인이나 나라나 氣의 총량이 어디로 가는지 알면 미래가 보입니다.

강남할아버지한의원 2018. 11. 23. 14:03

필자도 예외없습니다만 사람들은 힘들면 누구나 팔자타령을 합니다.
팔자타령 자체가 그냥 체념하는 자세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요즘 흔히 들리는 말로 흑수저로 태어난 아이가 고가의 집에 살면서 좋은 밥먹고 좋은 옷입고 좋은 차타고 다니고 좋은 직장에 다니다 좋은 집안의 배우자를 만나고 또 이후에 자녀로부터는 금수저 집안이라는 말을 듣기는 참으로 어려운 현실일 겁니다. 쉽게 말해서 흑수저가 금수저 집안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이렇게 이루어내기가 불가능한 현실을 자신의 팔자라고 표현하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것 같습니다. 만일 그래도 자신의 정열이 너무 강하다면 그러나 현실이 받쳐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을가요? 있습니다. 생각을 좀 더 넓히면 가능하죠. 즉 다음생 혹은 그 다음생에 이어 차분히 벽돌을 쌓듯이 그렇게 하면 결국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회활동의 생리적 바탕이 되는 건강도 역시 그러합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는 체질이라고 말을 붙입니다. 즉 생리적인 개성은 어떤 한계가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부모가 심장이 약하면 자녀도 역시 심장이 약할 수 밖에 없는데( 물론 정도의 차이나 후천적인 변화는 있지만... ) 이런 경우 자녀가 축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축구선수가 될 수 없는 것은 이미 정해진 생리적인 한계이니 체질적으로 선수로서는 부적합하다고 말하는 것이죠. 이런 상황을 사회적인 활동으로 표현한다면 축구선수는 내 팔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체념이라고 말하기는 지나침이 있고 그냥 합리적인 선택에 도움을 주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물론 종종 자신의 주어진 한계를 의지로 극복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늘 있습니다. 다만 그런 경우는 보편적이지 않을 뿐입니다. 예컨대 역사상에 큰 지배자였던 칭기스칸이나 누루하치 등은 자신들의 환경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능력과 한 시대적 흐름을 바꾼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를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버겁기에 그냥 "하늘에서 낸 사람" 으로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는가?"
이 말은 누구나 칭기스칸이나 누루하치가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위의 둘을 조합해 하나의 명제로 만들어 봅니다. 물론 참인 명제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꿈을 꾸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설계도 없이 집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란 것이 주위에서 눈으로 보거나 듣거나 해서 어떤 상(像)을 만들어 낼 때만 가능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보고 듣고 난 이후에 나름대로 모두 꿈을 꿉니다.
그러나 칭기스칸이나 누루하치는 보통 사람들이 꾸는 꿈보다 훨씬 더 크고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선악을 떠나 위대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만 싯다르타나 예수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는데 어떤 사람은 팔자라는 말에 쉽게 구속되고 어떤 사람은 팔자를 뛰어넘는 위인이 되는 것은,
첫째가 그 꿈의 크기이고 (실현 가능성의 여부와 상관없이)
둘째가 그 꿈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의 기운을 얼마나 쏟아부었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그런데 큰 꿈을 꾸는 것 자체가 보통은 스트레스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람들이 크게 성장하게 놓아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누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든가 혹은 왕회장이 되겠다는 꿈을 꾼다면 아마도 많은 손가락을 받을 것은 뻔한 현실이기 때문에 큰 꿈 자체가 스트레스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대통령이 꿈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이 결여된 꿈이므로 실제는 그건 꿈이 아닙니다. 막연히 높고 편한 사람이 꿈인 것이죠.)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보통 큰 꿈을 꾸기를 주저합니다. 물론 꿈조차 꿀 수 없는 환경의 한계도 있구요.

그다음은 그 꿈이 크든 작든 선이든 악이든 관계와 상관없이 실현의 가능성과 방법과 조건들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설계도와 집 짓기에 비유합니다.

설계도( 종이가 아니더라도 머릿속에 그린 것 포함)가 아무리 좋아도 돈과 자재 그리고 인력이 모자라면 집은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환경에 맞게 설계도를 조정합니다. 그러나 설계도에 신념이 확실한 주인이라면
돈이 없어 당장은 어찌할 수 없어도 설계를 줄이지 않고 그 설계에 맞게 하나씩 돈과 자재를 모읍니다.
이때 환경이 좋으면 쉽게 조달되기도 합니다만 그렇지 못 할 경우는 한 생이 다가도록 홀로 조금씩 쌓아갑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죽는다면 그 꿈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는 여전히 그 꿈은 남아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꿈은 결국 우주의 꿈이니까. 마치 한 사람의 은행계좌가 컴이 고장 나서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은행의 원본기록에는 여전히 그 은행계좌가 살아 있듯이요.)
그러면 누군가는 그런 꿈을 이어받아 다시 그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짓게 됩니다.

위의 위인과 보통사람과의 차이는 바로 그 실현 의지와 속도가 다를 뿐입니다.

만일 자신이 보통사람의 범주라면( 물론 보통 사람의 범주에 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 차는 여전히 다양할 것입니다. ) 꿈의 속도를 높이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무엇이든 현실에서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기가 필요합니다.
요즘 사회에서의 돈은 많은 사람의 기를 한꺼번에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수단이 됩니다.
때로는 권력도 그렇고 권위도 그렇고 동정심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의리도 그렇고 명분도 그렇고 진심도 그렇고... 많은 방법이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기를 소모시켜야 시공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를 소모시키기 위해서는 기를 모아야 합니다.
즉 집을 짓기 위해 돈을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집짓기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정도가 아주 강하다면 그 주인은 하루 종일 집짓기에 매달릴 것입니다. 혹은 자신이 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돈으로 다른 사람의 기를 빌리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체력이나 배고픔이나 휴식이나 놀이 등의 이유로 집짓기에 몰입하지 않습니다.
즉 이것은 집짓기에 대한 열망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데 그 일에 몰입하는 정도를 보면 그 일에 얼마나 자신의 기를 쏟아붓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기의 량과 질에 다라 그 성취는 감 잡을 수가 있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나라에서 어디에 집중해서 돈을 쓰고 사람들의 주위를 몰아가는지를 알면 그 나라의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예컨대 모래파기에 나라의 기를 쏟아부으면 모래파기는 반드시 성공합니다. 다만 그 모래가 다시 사람들이 소모한 기를 보충해줄 수 있다면 지속적으로 기가 돌아갈 것이고 만일 기를 보충해주지 못한다면 기를 쓰고 보충이 안되니 사람들은 기운이 팡질 것입니다.

만일 한 나라에서 요즘 첨단이라는 곳으로 기를 몰아간다면 반드시 첨단 부문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소모된 기를 보충해 줄 수 있으면 사람들은 기가 다시 차게 되니 기운이 늘 넘쳐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보면 나라의 미래를 보는 것이 너무 단순해집니다.
지금 나라가 어디에 기운을 소모시키는지를 볼 수 있다면 반드시 그 결과는 나타나는 것은 우주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이니까요.

다시 개인으로 돌아와, 자신이 지금 어디에 기를 소모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돈(사업)인지 연애인지 아니면 가족의 안녕인지 혹은 길거리에 나가 깃발을 흔드는 일인지...
가장 중요한 문제에 기를 쏟아붓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상태로 바라만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자신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늘 의식하면서도 막상 감성은 길거리 깃발에 흥분하는 분이 있다면 그런 분은 자신의 기를 돈에 쏟아붓는게 아니라 깃발에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은 결코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이런 구분, 즉 어디에 진실로 자신의 기를 쏟아붓는지에 대한 구분을 할 수 있다면 미래는 자신이 꿈꾸는 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즉 누구가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또한 바로 이런 이치로 어떤 종류의 신념이라도 그 신념이 무한히 강하다면 누구나 칭기스칸이나 누르하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