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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소리가 반복되면 음률화 되는 이유

강남할아버지한의원 2021. 8. 26. 13:26

어린 시절엔 국어시간에는 선생님께서 책을 읽게 했습니다. 아마 이런 풍습은 고등학교 때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꼬맹이 시절에는 일어나서 국어책을 들고 읽었습니다. 선생님한테 이런 기회를 받는 것도 조그만 영광이기도 했었고요. 그러면 부끄러워하는 여자애들은 소리가 너무 작기도 했고 남자애들은 마치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무슨 선언서 읽어내려가듯 하기도 한 기억이 있습니다.


60년대 초반에는 지금의 서울 변두리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문안과 거리만 가까웠지 당시의 변두리는 오늘날의 산골보다 더 시골스러웠던 기억입니다. 그런 시절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서민들의 밤은 길고 할 일은 없으니 등잔불에 모여 동네에서 일어난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이야기를 널려놓게 됩니다. 그래도 단순함이 반복되는 일상생활에 지루함을 잊을 정도의 이야깃거리는 늘 모자란 편이었습니다.

필자의 선친은 그래도 글을 좀 읽을 수 있는 혜택은 받은 분이라 종종 시장 길바닥에서 책을 사 오곤 했습니다. 종이 질이 조악하고 색이 회색인 아주 얇은 미렁지( =미농지 )로 만든 옛날 소설입니다. 근대 소설이 아닌 홍길동전 박씨전 같은 그런 책 들이었습니다. 저녁이면 어머니와 필자 앞에서 낭독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낭독하는 모양새가 아이들이 국어책을 읽는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어떤 음률에 맞추어 읽어주셨는데 당시의 필자는 늙으면 저렇게 읽는 구나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필자도 국어책을 읽을 때 선친의 흉내를 내서 읽어보았는데 도저히 안되었습니다. 한편 선친께서는 일반 소설을 읽으실 때에는 음률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박종화 소설은 그냥 천천히 읽으시든가 속으로 읽으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옛 소설은 그 문체에 내부적으로 음률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음률화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렇게 그렇게 필자도 나이가 들게 되었고 때로는 글을 소리 내어 반복해서 읽을 기회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몇 번은 국어책 읽듯이 그렇게 읽어가다 보니 금방 발음과 숨이 지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음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지요. 기계적인 정보 전달용 소리가 아니라 글의 내용을 느끼면서 반복해서 읽어야 할 때는 음률이 있게 된다는 것을요.

시조를 길게 읊어가는 이유도
염불도
하늘천 따지도
집단적으로 힘쓸 때의 구음이나 기합도
트럭 장사꾼들이 외침 소리도
그리고 심지어 학생들이 태종태세문단세 할 때도
모두가 소리를 낼 때 음률이 생깁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우리의 삶을 위한 생리적인 기전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소리를 내려면 체간의 많은 근육이 운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는 것은 체간의 근육들을 지속적으로 긴장하게 만듭니다. 결국 에너지 소모가 극심해지는 것이죠. 한편 소리는 뇌를 울리게 하므로 반복되는 같은 울림은 뇌를 피로하게 하고 습담을 쌓게 합니다. 그러면 집중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반복해서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절약해야 하고 그리고 소모되는 에너지의 균형도 필요합니다.
동시에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뇌에 적절한 기혈 순환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심장의 안정과 뇌습을 없애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생리적 요건에 최적화하기 위해서는 소리에 음률이 저절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음률이란 속도 강도 굵기 고저 등을 호흡과 심장박동의 기전을 최대한 지장을 주지 않은 범위에서 스스로 조율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개인마다 생리적인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도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리적인 차이로 인해 음률에 개인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똑같은 노래도 사람마다 미세한 차이가 생기는 것이죠. 혼자서는 그런 차이는 문제가 없는데 그러나 만일 집단적으로 소리를 내야 할 때는 바로 이런 생리적 차이가 집단의 하나 됨을 흐리게 합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소리 중간중간에 마디가 필요합니다. 그 마디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모으기도 하고 한꺼번에 발산하기도 하면서 조율하는 것이죠.

예컨대 시조라면 부채 탁으로
염불이라면 목탁으로
하늘천 따지는 좌우로 흔드는 몸의 율동을 이용하고
집단노동에서는 도움닫기용 소리를 낮고 길게 (예컨대 하나 둘.. 셋! 보통 현장에서는 로~바 응차!)
혼자 하는 호객 소리는 예컨대 튀기 튀기 뻥! 하는 식으로 발음 간격을 조절하고
태종태세문단세는 힘 있는 애들이라 빠르기나 셈여림에서는 변화가 약하지만 음의 고저는 집단적으로 뚜렷하게 나옵니다.

참고로 여러분들의 맘에 드는 시가 있다면 시가 갖고 있는 분위기를 느끼면서 수 천 번 낭송하게 되면 저절로 음률이 붙게 되고 나중에는 그 시에 가장 알맞은 노래가 됩니다. 장사익 선생님의 노래가 깊이 우러나오는 애틋함을 품어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생리적인 감성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글의 결론은 이 모든 행위가 그 바탕에는 우리들의 생리가 작용하고 있고 그러한 외부적인 표현은 우리의 삶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라는 거죠.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