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공감

평생 이 땅에 삼씨를 뿌린 사람의 이야기

강남할아버지한의원 2024. 9. 13. 13:27

이 글을 쓴 지가 18년 전입니다. 세월이 눈 깜박임입니다.

잊히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올립니다.

전에 학회 사이트에 올린 글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글 쓴지는 20년이 넘어가네요)

많이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여기에도 올립니다.

인용

한의학 후배님들 가운데 삼에 대하여 연구하실 분을 위하여 혹여 자료 정리에 도움이 될까 하여 일생 동안 이 나라 산에 삼씨를 뿌린 어느 분에 대하여 제가 경험한 바를 이야기해 봅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누군가 어디엔가에 기록을 남길 것으로 믿지만 우선은 삼을 직접 가까이하는 한의학도들에게 먼저 이야기를 해두는 것이 제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편하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에는 산삼을 캤다는 뉴스가 너무 자주 있는 것 같다. 수 십 년 전의 신문에 보도된 산삼을 캔 뉴스나 옛이야기에 나오는 산삼 캐기에는 산삼이 한 뿌리 혹은 한 뿌리와 새끼 몇 개 정도인데 비하여 요즘 뉴스에 나오는 것에는 수개에서 수 십 개를 캤다는 것이 흔하게 들린다. 왜 이렇게 산삼의 갯 수에 차이가 생겼는지를 더듬어보려면 이 땅을 사랑한 어느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를 원한다.

한 십오 년 전 ( 1990년대 초) 초여름 때의 일이다.

점심 먹고 회사를 나와 영업차 거래처를 대충 들르고 근처 안국동에 있는 인산 찻집에서 쉬고 있었다. 찻집은 인산할아버지를 따르는 자매가 전통 차나 죽염이나 물엿 등을 파는 그런 곳이었는데 풍문여고 길 건너 수운회관 쪽 주유소 옆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잠시 아가씨의 영업용 수다를 듣고 있는 중에 문 앞이 캄캄해지는 듯하여 보니 웬 사내가 머리 위로 넘어가는 큰 배낭을 지고 좁아 보이는 문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아가씨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구면인 것 같았다. 나는 당시에 영업이 피곤했던 터라 - 모든 영업이란 게 늘 피곤한 거지만 - 평일 날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 배낭을 지고 나타난, 나보다는 좀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사내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뜯어보니 허리에 쇠고리나 밧줄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전문 산악인은 아니데... 하고 속으로 참 팔자 좋은 사람이구나 부러움 반 자조 반으로 눈을 뗄 수가 없었지만 정작 그 사내는 좁은 공간에 유일한 손님이었던 나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시간 좀 지난 후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내가 그이한테 물었던 많은 것을 생략하고 답변만 적는다.

울릉도 부호의 아들이라고 했다.

물려받은 돈이 많아 직업은 없다고 한다. 유일한 취미가 전국의 모든 산을 돌아다니면서 삼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한다. 뒤쫓는 심마니들을 따돌리기 위해 때로는 밤중에 삼씨를 뿌린다고 한다. 삼씨를 뿌린 장소에 관한 지도는 대충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지도가 분실되어도 심마니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그랬다는 것이다. 이렇게 뿌린 지가 벌써 십 년도 훨씬 넘었다고 한다. 이 땅에 산삼이 사라졌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그런다고 한다. 지도를 만든 이유는 이 번에는 이 산의 저쪽 골짜기 다음번에는 저 산의 이쪽 골짜기 이렇게 전국의 산을 돌아가면서 씨를 뿌리니 나중에 같은 산이라 하드라도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삼을 다시 캐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참고로 60년대에만 하드라도 전국의 산이 민둥산이었다. 땔 감과 소먹이 등으로 산에 있는 모든 풀들은 싹싹 베어졌고 솔잎과 낙엽은 박박 긁혀서 아주 깊은 산이 아니고는 수풀이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기억해야 한다. 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심마니나 화전민들이 깊은 산이라도 샅샅이 뒤졌기 때문에 사실상 전국에 산삼이란 것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산들이 푸르게 된 것은 70년대에 연탄이 농촌까지 보급된 이후의 일이다.

그 시기에 나 역시 전국의 명산대천의 혈자리를 찾아다니면서 호흡수련이란 것에 빠져 있던 터라 연락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전화번호를 받아 놓았었다. 산삼에 욕심이 나서 그런 게 아니고 관동별곡에 나오는 표현대로 신선을 찾으러 단혈에 머무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국의 온 산의 지리를 다 아니 아무래도 산세에 관한 도움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닿을 듯해서 연락처를 받아 놓은 것이다.

그 후에 한번은 울릉도로 전화를 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통화를 못했다. 언제나 이 나라 산들을 돌아다니기 때문이(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었던 시절이다.(아마 일이 년 후에 무거운 모토로라 핸드폰이 주요 장급 지위에 있는 사람들한테만 보급되었었다.) 그러면서 세월이 조금씩 흐르자 내가 스스로 조용해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내면에서 몰입해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람을 쉽게 잊히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사랑한다는 것이, 더구나 이 땅의 식물을 사랑한다는 것이 오랫동안 기억을 하게 만들었나 보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나는 지지난해 여름에 장사익이라는 소리꾼을 알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장사익을 사랑하는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지난 겨울 장사모 정모 때의 일이다.

음식점에서 밥상 맞은편에 독도할미꽃이라는 장사모 회원과 마주 앉게 되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민족주의자라고 불러도 좋을 사람인데 지금은 야생초 먹거리를 재배한다고 하였다. 자연히 야생초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하다 잊히지 않은 바로 그 삼씨 뿌리는 사람을 말하게 되었다.

"아 그 사람요, 바로 제 친구의 형님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의무로서 바로 제가 지금까지 준비해온 발해 뱃길 탐사팀에 추모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뱃길 탐사 때 돌아가신 그들 중의 한 분입니다."

몇 해 전에 얼핏 뉴스를 통해 들은 것 같다. 발해 뱃길 탐사에 나섰다가 일본 어디엔가 상륙하기 직전에 풍랑에 조난당하여 동해에 잠든 사람들에 대해서다. 바로 그 사람이 발해 뱃길 탐사팀의 일행 중에 한 분이었고 이 나라 땅뿐 아니라 이 민족의 역사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인데 그 사람이 그렇게 되었구나... 우연히 들은 소식에 기쁨은 잠깐이었고 그분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은 길었다.

독도할미꽃도 삼씨를 어디에 뿌렸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지에 관해 모른다고 한다. 다만 그 사람이 이 나라 땅과 이 나라 역사를 목숨 바쳐 사랑했다고 한다. 물려받은 재산도 모두 거기에 쏟아 넣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삼씨를 뿌리기 시작한 지가 이미 30십 년을 넘어갔으니 요즘 흔하다고 할 정도로 산삼을 캤다는 뉴스를 접하는 것이 모두 이 분의 공덕이 아닌가 한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보았는데 산삼캐기 산행 모임이 유행하는 모양이다. 심마니나 혹은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안내원이 되어 산행팀이 짜진다. 산삼을 캐고 나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 분의 공덕이 헛되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사회적인 직책이 있어야만 쉽게 이름이 남겨지는 게 세상일인데 나는 우리 학회 회원들에게라도 이런 분에 대해서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나 역시 그분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으니 좀 뭐 하긴 한데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이 땅에 그런 삶도 있다는 위안이 아닌가 한다.

자연을 가까이하는 것이 단순히 산야를 돌아다니거나 사진 찍는 것이 아니다. 도심의 시멘트 벽 틈 사이에 생명을 이어가는 이름 모를 풀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자연에 가까이 가는 게 아닌가 한다. 놀이 삼아 하는 산삼캐기가 횡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에 또 다른 생채기를 내는 것이라는 누구보다도 한의학도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용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