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방

젊은 피 - 생리적으로는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강남하라비한의원 2021. 12. 28. 13:28

매체에 젊은 피를 수혈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대체로 조직에 활력을 준다는 뜻일 겁니다.
뜻은 그러한데 문자적인 표현 역시 생리와 일치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피는 에너지 원이니까요.
그 가운데 젊은 피는 에너지가 막 발산하는 기운을 뜻하니( 이 기운은 음양론에 소양지기에 속합니다.) 젊은 피를 수혈한다는 말은 에너지 원도 보충하고 같은 에너지 원이라고 하더라도 활동성이 강한 에너지 원을 보충하는 것이니 소위 젊어지는 묘약과 같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원뜻에 부정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치가 사람한테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데에는 늘 그렇듯이 문제점도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려되어 이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우선 생리적 이치부터 따져봅시다.

1. 소양지기( 少陽之氣 )를 취하는 이유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음식 가운데에서도 기운이 강한 것이 내 몸의 기운에  조금이라도 더 좋을 것입니다. 예컨대 소고기를 먹는 데에도 늙은 소고기보다는 젊은 소고기가 맛이 더 좋을 것입니다. 맛이 좋다는 말은 내 몸에 기운을 돋우는 데에 효율적이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너무 어린 소고기는 (물론 이런 것을 좋아하는 경우도 현실에서는 있지만) 충분히 자라지 않아 양과 영양이 불균형일 수도 있으므로 적당히 젊은 소가 가장 좋을 것입니다. 기미론으로 보면 소양지기가 강한 기미를 갖춘 소고기를 말합니다.

텃밭을 일구다 보면 식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배추를 심었다면 너무 어린싹은 량도 적고( 그만큼 노동력도 많이 들고) 혀끝에 자극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손바닥 만한 크기의 배춧잎은 먹기에 가장 좋죠. 그리고 자연의 배려인지는 몰라도 이때쯤부터는 벌레들이 몰려들어 배춧잎을 갉아먹습니다. 너무 어린싹에는 아마도 싹을 보호하기 위한 독소가 들어 있어 이때는 벌레들도 피하나 봅니다. 물론 자연은 동식물들이 다들 먹고살게 성장기의 순환을 조절하였을 것입니다.

2. 소양지기를 취하려는 인간의 슬기

사람도 배춧잎 벌레와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많으니 가장 적합한 시기를 판단하여 동물이나 식물을 수확합니다. 그리고 인구 수와 노동력을 고려하여 요즘은 동식물을 재배하기도 합니다. 재배산은 자연산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조금 떨어지겠지만 과잉인구의 생존의 면에서 보면 질보다는 양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양을 떠나 질을 본다면 음식재료를 수확할 때 기의 흐름으로 보면 소양지기가 가장 충만할 때가 좋습니다.  사람에 비유하면 사춘기 시절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 여건은 다양하므로 이 짧은 순간에 항상 맞추어 수확할 수는 없지만 수확기는 대체로 이 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의 활동성(= 양기 )은 타고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선천지기와 살아가면서 소모되는 양기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음식으로 들어오는 후천지기 분류할 수 있는데 바로 이 후천지기 살아가는 데에 당장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 후천지기 가운데 시기적으로 소양지기가( 소양 양명 태양 가운데 가속도가 가장 큰 것이 소양, 양명은 가속도가 0 근처 그리고 태양은 양은 총량은 가장 크지만 양기의 활성도를 의미하는 가속도는 0 보다 작음) 가장 활동성이 크다는 것이죠. 당연한 것이지만 음식재료가 너무 어리면 양기의 총량이 모자라고 너무 늙으면 양기의 활동성이 없으니까요.

자 그런데 인간은 생각할 줄 아니 미래에 자연환경이나 사회환경이 변하면 혹시 자신의 생명에 위험이 있을까 걱정하게 됩니다. 이런 걱정은 점점 더 커지게 되어 욕심이 지나친 상태를 말하는 탐욕에 빠지게 됩니다.

3. 인간의 탐욕


생각하는 사람은 겨울을 지내기 위해서는 쌀과 나무를 충분히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야 춥고 배고픈 시절을 버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나온 과거를 보면 이 부분이 늘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굶어 죽거나 혹은 굶음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병증이나 사회적인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대체로 음식과 옷이 충분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말이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흔히 듣는 우리 동요를 사례로 들어봅니다.

우리 동요에 "펄펄 눈이 옵니다"라는 노랫말이있지요? 1절 가사에 하늘에서 선녀님들이 솜을 뿌려준다는 희망을 2절에서는 하얀 떡가루라는 희망을 말합니다. 즉 어른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어린이들이 몸 따시고 배부른 것에 대한 희망을 하늘에 기대하고픈 감성인 것이죠. 왜 이웃이나 부자나 정부가 아니고 하늘일까요? 사람이 그렇게 해줄 리도 없다는 것을 익히 아는지라 대상이 좀 애매한 하늘에 기대라도 해보는 거죠. 그러나 역시 하늘도 해결해줄 리가 없다는 것을 체험으로 사람들은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도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 싶은 사람들은 이러한 희망고문이 싫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정서가 어린이 노랫말에도 그대로 비추어져다는 것은 어린이나 어른들도 늘 춥고 배고프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늘 이래 왔으므로 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탐욕을 더 크게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솜과 떡으로 부려먹으니 재미있기도 할 겁니다. 이런 순환이 반복되자 사회는 늘 갈등의 연속이고 그러다 보니 힘 있는 사람들은 보다 정교하게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나가게 됩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세상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작은 부분에서는 정의로운 세상일 수는 있어도 큰 부분에서는 정의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좀 안다는 사람들부터 세상의 정의보다는 자신이라도 좀 더 강하고 오래 살아가야겠다는 것으로 삶의 목표가 자연스럽게 생성됩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건이 불사약을 찾았던 진시황 일화인데 그런 일화는 지나간 이야기가 결코 아니고 요즘 세상에도 여전히 이어오고 있는 탐욕입니다. 물론 요즘은 불사약을 찾는 과정을 생명과학이라고 부릅니다.  

4. 세상에 퍼져있는 옛이야기 가운데 인신공양에 대한 진위

자,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세상 어디에나 퍼져있는 옛 설화를 하나 생각해보죠.
다수의 안전을 위하여,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어디 동굴에 어디 어디 산이나 바다 등등에 젊은 처녀를 바친다는 이야기가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세상의 어느 곳이든 있어왔었습니다. 우리의 심청이와 인당수 이야기는 아주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고요.  누누이 말하지만 세상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어디엔가( 그것이 아무리 꾸면 낸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에 상응하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존재한테 어린 사람을 음식으로 접대했다는 설화인데 이런 설화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바탕으로 생겨난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필자도 상상이 안 갑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린 사람을 마치 우리가 텃밭에서 자라는 어린 배추 솎아 먹듯이 누군가는 먹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먹다니? 쉽게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년 전에 세계적인 회사의 햄버거에서 인체 부속물이 나온 얘기나 한국의 오모씨가 젊은 처자의 육편을 매매했다는 공식적인 법원 사류가 증명해 주듯이 실제로 이런 일은 지금도 벌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 옛날에 있었다면 지금도 있을 수 있다는 전제는 참이겠습니다만...).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궁금한 점이 있지요. 오씨도 생명을 걸고 작업한 것인데 사람의 편육이 소고기처럼 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먹었을까요? 분명하게 추정되는 상황은 적어도 돈이 많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도 어떤 분야에서는 설화 시대와 다르지 않은 이런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옛 설화나 현대의 오씨 건이나 공통적인 점은 피해자가 어린 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육 탐식자들은 자신의 몸을 보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시킨 것입니다.
여기서 최근에( 사실은 오래전에도 발표된 이론이지만) 나온 논문 하나 링크해드립니다.
젊은 피가 몸에도 좋다는 내용인데 문제는 이런 논문을 통하면 마치 과학이란 이름하에 비윤리적인 행위가 합리화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https://www.chosun.com/economy/science/2021/12/15/4GPYC5Y56VDPBHM45IFUCZPU3I/?utm_source=daum&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daum-news

5. 동족을 먹는 행위는 영혼을 망가뜨린다.

모든 생명체는 물질로 된 육체와 그 육체에서 오는 신호로 안전하게 성장하는 정신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정신의 분류는 선을 그을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예부터 영혼백(靈魂魄)으로 나누었습니다.
영은 가장 상위의 자아로 종족의 공통으로 영향을 주는 정신이고 혼은 개체의 개성에 영향을 주는 정신이고 백은 하위의 자아로 육체에 깃든 정신입니다. 그러나 분류는 분류일 뿐 실제는 영혼백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소고기를 먹게 되면 소의 영혼은 이미 윤회라는 자연으로 돌아간 상태이나 소고기에 깃든 백은 우리 몸에 들어와 육체의 작용을 통해 우리의 혼백에 영향을 줍니다. 이것은 현실에서 눈으로 입증할 수 있는데 예컨대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의 기색과 풀만 먹는 사람의 기색이 확연하게 다른데 그 이유는 전자는 동물의 활동적인 백이 그 사람의 백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고 후자는 반대로 식물의 상대적인 비활동성이 그 사람의 백에 영향을 주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소고기가 비록 백에 양향을 준다 하더라도 사람의 영혼은 소의 영혼보다 상위에 있고 또한 소의 백에 영향을 받은 사람의 백보다도 역시 상위의 자아이므로 비록 소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해도 소의 백이 사람의 영혼에 주는 영향은 극히 미미하거나 정신이 뚜렷한 사람한테는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족 즉 인육을 먹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인육을 먹게 되면 피해자의 영혼백에 영향을 바로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동격의 정신이니까요.
쉽게 말해서 인육을 먹게 되면 피해자가 갖고 있었던 정신세계와 죽기 직전에 느끼던 두려운 감성까지도 백으로 그대로 결합되어 소위 인격이 인육 탐식자의 정신과 인육 피해자의 정신이 합쳐진 이중적인 영혼백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점점 더 미쳐가는 것이지요. 만일 이런 사람이 권력을 갖고 있다면 (있겠죠), 그 사람이 휘두르는 권력은 점점 더 사회적인 흉기가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한의학에서도 인육이라고 할 수 있는 태반을 약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필자는 언제부터 약재로 쓰였는지 상고해보지는 않았습니다. 태반은 버리는 부속 조직이라 괜찮다고 생각해서 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래도 뭔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역시 명청대의 한 유명한 유의( 儒醫 ) 였던 장경악은 이것을 매우 비난했었습니다. 태반도 인육인데 이것을 약으로 쓰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죠. 필자도 이 부분에서는 이 분의 견해에 동의했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태반( 요즘 화장품 회사에서는 많이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은 인육이니 그냥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순리라고 봅니다. 태반의 기미는 영양이 주요한데 영양은 다른 음식이나 약재로 충분합니다.

기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태반이 약재가 된다고 하면 정상적으로 버려지는 태반뿐만이 아니라 탐욕에 젖은 사람들은 마치 오씨가 사람을 사냥하듯이 태반도 그렇게 사냥될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위에 링크한 젊은 피에 대한 학문적인 어쩌고 하는 논거 등도 역시 범죄에 동조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 늘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샹그릴라를 소돔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일부의 탐욕자가 아니라 정신 차리지 않은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만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여서 하는 대화 중에 젊고 싱싱한 처자가 좋다는 사람들 -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그 사실을 어디에 적용하는냐에 따라 자신과 대화자를 함께 세상을 어둡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정신 차리는 것입니다.

- 끝 -